마음속 생채기가 덧나기 전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부쳐
사소한 짜증 같은 감정적 동요를 유난히 복기하게 되는 시기가 있다. 그러면 고민이 되고 고뇌가 생긴다. 마음속 생채기가 자꾸 생각에 닿아 상처로 번지는 것. 이렇게 생긴 괴로움은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어렵다. 최대한 감추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거니와 여러 겹 얽힌 감정을 풀어 전한다는 것이 어렵기만 하다. 부쩍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며 "나는 성격이 별로여서"라는 말로 운을 뗀 적이 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글로 풀면 마음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는 것을 알기에 부러 써본다.
평소 예민하다는 평보다 둔하다는 핀잔을 20배는 더 자주 듣고 살았는데, 요즘 나의 속을 들여다보면 민감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벌어진다. 상대방의 말 한마디에서 읽어낸 태도를 함부로 판단하며 관계마저 규정짓고자 했고, 저녁 시간을 일부 허비한 자신을 존재가치와 결부하면서까지 자책했으며,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해 다분히 공격적으로 권리를 따져보기도 했다. 그리고 때때로 마땅히 계획성이 요구되는 시점에 왠지 무언가에 굴종하는 것 같은 분한 기분이 들어 평소 성향을 들먹이며 계획을 세우지 않겠노라 고집을 부렸다.
앞서 열거한 상념들이 나의 정신 건강에 해를 끼쳤음은 물론이다. '마음에 굳은살이 앉는다'는 표현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굳은살'에 덮인 줄 알았던 상처도 떠올릴 수록 얼마든지 곪을 수 있을 테니. 마음의 묘한 속성은 한 대상에 몰입하는 정도에 따라 그 대상이 나의 몸과 마음에 끼치는 영향력을 한없이 키울 수 있다는 점이다.
엄살을 길게 늘려 썼지만, 내가 무너지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나를 지탱하는 것은 "지금 눈앞의 할 일"이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중압감을 선사하기에 고맙다고까지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이들의 덕을 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가 모교 졸업식 축사에서 거듭 "자신에게 친절하길"이라고 당부하는 문장을 읽었다. 우리 엄마도 "자신을 소중히 하라"고 여러 번 이야기하고는 한다. 두 사람이 말하는 그 경지가 나에게는 아직 아득해 보인다. 다만 '지금 몰입을 부르는 일'을 소중히 하고, 온 힘을 다해서 할 수는 있다. 그 '소중한 일'을 해낸 자신을 만나면 조금은 친절할 수 있는 길도 열릴 것 같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다소 모질더라도 당분간 나와 지금처럼 지내야 할 듯하다.
얼마 전, 말기 암 환자들의 삶과 임종의 순간을 담은 KBS 다큐멘터리 〈앎〉을 일부 봤다. 하루의 삶이 본인과 가족에게 더없이 간절해진 사람들의 이야기. 터지는 울음을 참으면서도 그러한 상황을 겪지 않는 자신에 대해 찰나의 순간이나마 안도감을 느낀 내가 스스로 혐오스러웠다. 죽음에 대해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치열하게 연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다. 임종에 대한 지식을 접하고 사색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생채기가 아무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