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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Aug 13. 2018

사랑고백이 없던 연애

비슷하지만 특별한 두 감정 "사랑함"과 "좋아함"에 대해

"oo야, 사랑해."  

일 년 반 정도 사귄 남자 친구가 있던 나는 여러 명이 모인 술자리에 참석하게 되었고, 우연히 옆자리 앉게 되어 주식 이야기부터 연애 이야기까지 한 시간가량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남자에게 들은 말이었다. 무려 처음 본 그는 내가 '이상형'이라고 했다. 당시 나도 술기운이 올라 그의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태도가 나쁘지 않았고, 나의 현재 연애 상태에 대해 아무 자각이 없어질 때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주 한 병 반을 마신 상태임을 고려하더라도 나를 사랑한다고? 처음 봤는데?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인가? 저렇게 사랑한다는 말이 쉽단 거야? 허무했다. 당시 사귀고 있던 정작 이 말을 듣기 소망했던 남자 친구에게서는 죽어도 나오지 않았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좋아한다고 말하지.. 그럼 술자리 이후 그와 나는 친구라도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영화'레이디 버드'에서 고등학생인 여자 주인공은 우리네 사춘기 시절과 겹치듯 엄마와 매일 같이 싸운다. 오죽했으면 엄마와 함께 달리던 차 안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려버릴 정도였으니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고 자신의 꿈을 인정해 주지 않는 엄마를 향해 주인공 '레이디 버드'는 질문한다. "엄마는 나 사랑해?" 이에 엄마는 곧장 "사랑하지"라 대답한다. 덧붙여 딸은 "그럼 나 좋아해?"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그에 대한 엄마의 대답은 "..." 슬픈 침묵이었다.  사랑하지만 좋아한다는 말은 선뜻 나오지 못하는 관계가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어 분명 사랑하긴 하는데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한 장면을 통해 바로 알아차렸다. 사랑함의 개념은 좋아함의 상위 개념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조금은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또, '연애의 목적'에서 박해일이 6년 사귄 옆 학교 교사 여자 친구를 두고 매력적인 교생 강혜정을 앞뒤 재지 않고 꼬시게 된다. 6년 사귄 여자 친구를 사랑할지는 몰라도 강혜정의 마음이 너무 갖고 싶어 물불 가리지 않고 노골적으로 대시하게 되는 그 감정에 대해 박해일은 많이 좋아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박해일이 느끼는 좋아함의 감정은 6년 연애의 여자 친구를 '사랑함' 보다 열정적이었고 관능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1년 미만의 남녀 관계에서 사랑한다는 말보다 좋아한다는 고백이 입 밖으로 나올 때 더 매력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사귄 지 한 달 된 남자 친구의 생일이었다. 향수 선택에 꽤나 까다롭게 굴었던 그에게 어울릴 톰포드 향수를 고심 끝에 골랐다. 그리고 함께 제공된 작은 선물 카드에 간단히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적고 추신으로 사랑한다는 말로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왠지 그래야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그것의 무게가 감당되지 않았고 그 또한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는 생각에, 대신 3초 정도 생각을 하고 나선 마치 큰 결심을 한 듯 "많이 좋아해요"라 덧 붙였다. 훗 날 일 년이 넘어 불 같은 연애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서두에 언급했듯이) 많이 좋아한다는 고백이 전부였던, 서로 사랑을 입 밖으로 고백한 적이 없는 관계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내 연애사를 통틀어 내가 가장 사랑했던 이성 친구로 남았는데 말이다. 사랑고백에 대해 너무 많은 의미 부여를 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둘 다 여러 번의 연애를 경험하고 과거의 실패에 대한 성찰을 통해, 연애에서 절절한 사랑 고백은 그다지 큰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걸까?


이별 후 깨달은 것은 실은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듣지 않아도 그만이었다는 것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 동안 마주 잡았던 따뜻한 그의 손이 대신 말해 줬고, 늘 나보다 걸음이 빨라 앞서 갔지만 이내 멈추어 나와 함께 맞추어 걷던 그의 걸음걸이가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교통체증이 심한 토요일 저녁 경부고속도로를 통과해 아무 말 없이 한시 간 반이 걸려 우리 집으로 오던 그의 행동도 대신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새벽 세시까지 힘들었던 회사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그의  배려심이 사랑한다는 고백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가볍기 그지없던 그가 했던 고백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진짜 그 시간만은 나를 사랑했던 게 아닐까? 남녀 간 사랑은 뭘까? 몇 달, 몇 년 정도를 만나야 붙일 수 있는 고귀한 단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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