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2년 차에 있었던 일이다.
나 같은 머저리가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회사에 들어왔지?
늘 센척하던 입사 동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될 줄이야.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힘든 내색 한번 없던 그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니 안도감과 동시에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사회 초년생이 모두 겪게 되는 통과의례라고 하기에는 현실이 가혹했다. 지금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사회 초년생이 완벽하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것이거늘, 자책하고 방황했던 찬란한 청춘이 안타깝다. 여러분을 과거의 '우리'라고 생각하고 미국의 전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미국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50세가 될 때까지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성적, 운동, 집안 환경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고등학교는 남들보다 1년 늦게 들어갔고, 그토록 원하던 해군사관학교는 해마다 낙방했다. 삼수 끝에 육군사관학교로 입학했는데, 같은 해에 입학한 한 동기들보다 무려 4살이 많았다. 졸업 후 장교가 되어서도 그는 전투부대의 지휘관보다는, 후방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소령 진급이 늦었고 소령에서 중령으로 승진하기까지는 무려 10년이 넘게 걸렸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은 그의 능력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주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52세의 나이에 뒤늦게 장군으로 승진한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커리어는 마치 활시위에서 튀어나온 화살처럼 비약했다. 같은 해에 소장으로 진급했고, 1942년에는 중장으로, 1943년에는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4년에는 미군의 원수가 되어 무려 별을 5개나 달았다. 불과 3년 만에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1953년 그는 미국 제34대 대통령이 되어 한국전쟁을 종결시키고 휴전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재선에도 성공해 1961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아이젠하워를 미국인들은 ‘아이크’라고 부르며 지금도 존경하고 애정 한다. 그의 생활신조는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게 무엇이든 최선을 다한다’이다. 그의 자질이 훗날 리더로서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것이다. 그는 중재하고, 의견을 모으고, 소통하는 리더였다. 어릴 적부터 주목받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근성이 훗날 ‘소통을 잘하는 대기만성 리더’로서 그를 성장시킨 것이다.
번데기 사진은 그것이 나중에 나비로 변신할 것이라는 사실까지 말해주지 않는다.
『버크민스터 풀러』
여러분은 위와 같은 일화를 읽고 긍정의 힘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계속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여 주저앉아버릴 것인가?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질지는 이제 여러분의 몫이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회의시간만 되면 나는 몹시 불편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회의시간에 나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모두에게 화려한 조명이 비치는데 내 자리만 불이 꺼진 것 같았다. 어쩌다가 내가 말할 차례가 되어 시선을 집중받는 순간에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랐다.
나는 무엇이든 느린 사람이었다. 남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속도도 느리고, 순발력도 느리고, 말하는 속도도 느렸으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시간도 남들보다 오래 걸렸다. 빠른 시간 내에 보고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순발력 있게 대처해야 인정받는 회사에서 나는 부적응자로 느껴졌다. 늘 주눅 들어있었다. 하루는 팀원들과 함께 성격유형검사를 했다. 모든 팀원들의 테스트 결과가 꽤 정확하게 나왔다.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나를 나타내는 키워드는 ‘아이디어 뱅크’였다. 우리는 모두 웃었다. 의견도 없고 아이디어 없는 내가 아이디어 뱅크라니 결과가 잘못 나왔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돌이켜서 생각해보니 그 결과는 꽤나 정확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계기가 있다.
[계기]
퇴사 후, 강사 3년 차에 필라테스 동기 추천으로 이직과 동시에 매니저 직함을 달게 되었다. 과거에 팀원으로도 존재감 없던 내가 과연 매니저를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됐다. 무엇보다 매니저라는 직함을 달기에 강사 경력도 부족했다. 출근 전부터 무척 긴장되었다.
첫 출근을 하니 센터는 넓은데 고객이 턱 없이 부족했다. 텅 빈 공간에 적막만 흐를 뿐이었다. 초면인 동료 선생님들과 서로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일주일이 흐르고, 나는 리더로서 무언가 보여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부터 고객 상담 화술과 마케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매니저로서 가장 처음 시도한 일은 이벤트를 만든 것이다. 지역 특성을 고려해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개인 레슨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합리적인 가격에 개인 레슨과 그룹레슨을 결합한 이벤트 상품을 기획했다. 상담하는 방법도 이전과 다르게 매뉴얼을 만들었다. 호기심에 들어온 고객일지라도 '나와의 상담 후에 적어도 체험 등록이라도 하고 센터 밖을 나서게 만들자'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마인드 셋을 바꾸고 상담을 하자 워크인 고객들의 결제율이 거의 100%에 달했다.
내가 만든 이벤트 상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매달 적자였던 센터의 매출이 내가 매니저가 된 이후 1달 만에 BEP(Break even point)를 달성했다. 2달 만에는 순이익 1000만 원을 만들었다. 나의 월급과 강사들의 월급, 월세, 관리비 등을 제외한 순이익을 말하는 것이다. 대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누군가에게는 1000만 원이 성과라고 부르기에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월급쟁이가 회사 밖을 나와 순수익 1000만 원을 처음 만들어 본 경험은 분명 충분히 성취감을 느낄만한 일이었다.
그 후, 함께 근무하는 선생님들과의 스터디 시간을 가지고 수업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체계적인 고객관리를 위한 시스템도 만들었다. 일이 무척 재미있었다. 매니저 경험을 통해 나는 리더로서 주체적으로 일을 해야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1인 사업을 하면서는 매니저로서 일을 하던 시절보다 더욱 의욕이 넘쳤다. 특색 있는 장소에서 원데이 클래스 이벤트를 열어 직접 수업을 하고 벨리댄스 공연을 하는 등 새로운 도전을 계속해서 했다.
회사에서 상사가 시키는 일만 하면 실수투성이에 꿀 먹은 벙어리로 전락하던 내가 도리어 사업을 하며 주도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회사 밖을 나온 뒤로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계속 발견해나갔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희열을 느꼈다. 나는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의 효율이 떨어졌지만, 대신 자발적으로 일을 할 때 그 누구보다 창의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샘솟았다. 물론 과거에는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감히 주도적으로는 일한다는 것을 상상해보지도 못했다. 지나치게 주위의 평가를 의식했던 과거의 그릇된 사고방식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깨달았다. 마인드 셋을 바꾸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순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다.
『버크민스터 풀러』
아웃사이더는 내향적이고 주목받지 못하는, 그리고 인사이더는 외향적이고 주목받는 성향을 일컫는 말이다. 외향적인 성향이 마치 내향적인 성향보다 우위에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상황과 소속에 따라서 우리는 누구나 다 ‘인싸’ ‘아싸’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