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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날 때, 우리는 솔직히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의 자존감에서 배운 감사한 하루

by Purity and humility

퇴원 후 아들을 목마 태우고 계단을 올랐다.

며칠 만에 함께하는 시간이라 그런지 아이는 들뜬 얼굴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 짝꿍과의 사소한 다툼, 새로운 놀이 이야기를 숨도 고르지 않고 이어갔다.

나는 힘겹게 발을 옮기면서도 그 목소리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아이는 단순히 하루를 보고하는 게 아니라, 자기 세계를 통째로 펼쳐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 아들은 갑자기 말했다.


“아빠, 나는 겁이 많으니까 벽 쪽으로 가 줘. 무섭단 말이야.”


그 순간 나는 걸음을 멈췄다.


‘겁이 많다’는 건 보통 아이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약점이다.


그런데 아들은 오히려 이를 당당히 인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요청했다.

발달심리학자 에릭슨은 아동 발달의 중요한 단계로 ‘자율성 대 수치심’을 말한다.

아이가 자기 부족을 말할 수 있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건 수치심보다 자율성이 우세하다는 뜻이다.


장욱진.jpg 장욱진 선생님 작품

그것은 자존감의 건강한 씨앗이었다. 어

른들이라면 보통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빠도 힘든데 내가 참아야지.”


그러나 그 말은 배려의 가면을 쓴 자기 억압일지도 모른다.


사회학자 고프먼은 인간이 늘 무대 위 배우처럼 스스로를 연출한다고 했다.

우리는 체면과 역할에 매달리지만, 아이는 아직 무대 밖에 서 있다.

꾸며내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The walk 샤갈.jpg <샤갈 the walk>


부족함을 인정하는 솔직함,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자신감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부러웠다.

나보다 훨씬 자존감 있는 존재처럼 보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들이 이런 태도를 지닐 수 있었던 건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곁을 지켜준 아내 덕분이라는 사실을.


아내는 아이 곁에서


“괜찮다, 네가 원하는 걸 말해도 된다”


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해왔을 것이다.


그 지지가 있었기에 아이는 스스로를 숨기지 않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계단을 오르는 건 내 다리였지만, 사실 나를 끌어올린 건 아들의 말이었다.

겁이 많다는 걸 인정하는 힘, 솔직히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 그리고 그 곁을 묵묵히 지켜준 아내의 사랑.

그 모든 것이 모여 계단은 단순한 오르막이 아니라, 가족의 성장을 확인하는 길이 되었다.


나는 오늘 다시 한번 감사라는 단어의 무게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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