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김지수
스승이란 무엇인가. 시인 이성복은 스승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스승이라고.
“아니야. 나는 매번 패했어. 글 쓰는 사람은 매번 패배한다네.”
“이해가 안 되는군요. 글로 치면 모든 영역에서 거의 다 백전백승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라네. 난 매번 KO패 당했어. 그래서 또 쓴 거지. 완벽해서 이거면 다 됐다, 싶었으면 더 못 썼을 거야. …”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에 대한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에고이스트지. 에고이스트가 아니면 글을 못 써. 글 쓰는 자는 모두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쓰는 거야. 자기 생각에 열을 내는 거지. 어쩌면 독재자 하고 비슷해. 지독하게 에고를 견지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만인의 글이 되기 때문이라네. 남을 위해 에고이스트로 사는 거지. “
”… 민주주의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라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 간곡히 당부하네만, 그대에게 오는 모든 지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말게나. “
”…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에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야. 발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
“늙으면 한 방울 이상의 눈물을 흘릴 수 없다네. 노인은 점점 가벼워져서 많은 것을 담을 수 없어. 눈물도 한 방울이고, 분노도 성냥불 휙 긋듯 한 번이야. 그게 늙은이의 슬픔이고 늙은이의 분노야. 엉엉 소리 내 울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도 행복이라네. 늙은이는 기막힌 비극 앞에서도 딱 눈물 한 방울이야.”
”…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네.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 은폐가 곧 거짓이야. 그러니 자네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떠오르는 것, 들춰지는 것들을 그때그때 잘 스냅 하게나. “
“…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오이디푸스를 떠올려보게. …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저편의 세계, something great가 있다는 거야. 지혜자만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네.”
“알아도 모른 체하고 몰라도 아는 체하며 사는 게 습관이 된 사회는, 삐걱거리는 바퀴를 감당 못 해. 튕겨내고 말지. 나뿐이 아니네. 글을 쓰는 사람들, 한 치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고통을 겪게 돼 있어. 요즘엔 더하지 않나? 생각이 자랄 틈을 안 주잖아. 인터넷에 물어보면 다 나와. 이름 몰라도 사진 찍어서 올리면 다 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내 머리로 생각한다네.
“시간이 걸려도요?”
“그럼. 모르는 시간을 음미하는 거야. (활짝 웃으며) 모르는 게 너무 많거든.”
“선생님! 일상에서 생각하는 자로 깨어 있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연습을 해야 합니까?”
“뜬소문에 속지 않는 연습을 하게나. 있지도 않은 것으로 만들어진 풍문의 세계에 속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 진실에 가까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네. 그게 Thinking man이야.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사고해야 하네. 어른들은 머리가 굳어서 ‘다 안다’고 생각하거든. ‘다 안다’고 착각하니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거 묻지 말라’고 단속을 해.”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아. 생각이 곧 동력이라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력 속의 세상이야. 바깥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중력을 받고 살아. 억압과 관습의 압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 생각을 다루는 인지론, 실천을 다루는 행위론, 표현을 다루는 판단론. 인간으로 풍부하게 누리고 살아가려면 이 세 가지 영역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네.”
“젊었을 때는 관심이 최우선이었어. 사오십대 되니 관찰을 알겠더군. 늙어지니 관계가 남아. 관계가 생기려면 여러 대상에 한꺼번에 기웃거리면 안 돼.”
“… 이전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내가 되었지.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고 관대해질 수 있을까 싶어. 뒤늦게 생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네.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걸.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다는 말은 목사님 같은 소리가 아니야.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그의 말처럼
지난봄 마흔이 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산 책을
여름, 몸과 마음이 고꾸라지는 것 같은 여름날이 되어서야 읽은 게 정말이지 선물 같다.
글 쓰는 치로 살겠다고 다짐한 지 십 년을 훌쩍 넘기고
현실과 꿈, 의무와 바람 사이에서 자빠지기를 셀 수 없이 하며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을 중심을 조금씩 세워왔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아직’에 머물러 있다고 느낀다.
오랜 시간 나는 그 이유가 내 자존감이 낮은 탓이라 여겨
나를 탐구하고 자존감을 끌어올릴 방도를 찾아 내면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지금은 무작정 나를 한계 짓지 않고 적당히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아직’ 나는 예술가가 되지 못했고
‘아직’ 나는 내가 바라는 글쟁이가 되지 못했지만
예술가로 사는 이들의 마음과 작품에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흐른다.
흉내 낸 떨림이 아닐까 끊임없이 나를 의심해 보았지만
진심이라는 걸, 그 마음이 내 것이라는 걸 이제 나는 확신한다.
그게 그네들을 이해하는 치로서 갖는 마음인지
내가 언젠가 진짜 글쟁이가 되려고 이러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바라기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독의 자리를 성실히 지켜낸 삶이 내게 왜 허락되었는지
내 마지막에는 알 수 있기를.
감히 지성과 영성의 위대한 스승인 이분의 터럭만큼도 깨달았다 할 수 없지만
선생이 말하는 ‘생각’의 자리를 무슨 일이 있어도 견지하겠다는 내 오랜 다짐만큼은 놓지 않으리라,
아니 놓지 않는 게 맞다는 확신 하나만큼은 얻을 수 있어 감사하다.
또한 죽음을 말 그대로 코 앞에 둔 그가 이제야 여유와 관대함을 찾았다는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된다.
아직 나는 내가 걸어온 삶의 두 배쯤 가야 그 지경에 이른다는 말이니
지금 나의 헤맴은 당연하구나 싶어서.
길은 가봐야 아는 것이라 생각한다.
걸어져서 지금껏 걸어왔으니
걸어지는 만큼 가보자고,
마지막까지 온 삶을 그러모아 책 한 권의 지혜를 주고 떠난 그의 말에 힘입어 또 한 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