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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Oct 24. 2023

돌봄이 절실한 가을날에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에서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분노는 배출될 수 없는 독처럼 하루하루 당신 몸에 쌓여갔다. 당신은 당신의 분노가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하고, 그저 당신 자신의 행복을 깨뜨리고 있다는 생각에 슬픔을 느꼈다. ...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면서 자기 분노 속에 갇혀 있을 뿐이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그건 당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 글 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몫' 중에서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 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일 년' 중에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썼지.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느끼며 자라서인지 나에게는 내가 결코 타인에게 호감을 살 수 없는 사람, 멸시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거든. 그럴수록 나는 남들에게 더 맞춰 줬고 남들이 나를 좋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번 고민했어. 그렇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남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고 남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나의 욕구를 무시했지. 그때 내가 느꼈던 가장 큰 두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실망하는 거였어. 나는 절대로, 절대로, 누군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

나는 웬만한 일에는 감정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잘 참고 견디며 살아왔었어. 참는 건 내 생존 방식이었지. 맞서 싸웠다가 결국 곤란해지는 사람은 내가 될 거라는 걸 알아서이기도 했고, 나를 어떻게 건드리든 반응하지 않고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무시하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아. 그건 내가 언니를 보고 배운 것이기도 했지. 그저 참는 것.


                             '답신' 중에서


...최은영의 작품은 언제나 미묘한 파동이 만들어진 원인으로 여러 사회 조건 및 역사적, 구조적인 문제가 얽혀 있다는 것을 짚어왔다.  ... 최은영은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일에 '여전히' 용감하다. 최은영의 인물들에게 '공감의 유대'를 이루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지금 시대가 사소하다고 앞서 판단하면서 축소시키려는 현실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물으면서, 이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궁리하면서 형성된다.


                  해설 '더 가보고 싶어' 중에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나는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를 풀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나의 결핍을 안고서 그것을 너무 미워하지도, 너무 가여워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슬프면 슬프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 나는 지금 그런 일을 하는 중인 것 같다.


                       '작가의 말' 중에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지난한 날들에

나는 이번에도 최은영의 소설을 찾았다.


책을 펼치고 십 분도 되지 않아 가슴이 쿵했다.

내 마음과 꼭 같은 것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의 말들이 다 나였다.

내 상처고, 아픔이고, 결핍이었다.


딱 하나,

그 모든 걸 엮어 펴낸 그녀의 용기.

해설에서 설명한 대로

개인의 절망을 포용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를 짚어내는 용기는

내게 없는 것이었다.


인물과 배경을 통해 그녀가 고발하는 현실에 너무나도 공감하는데

나는 가까운 친구와 카페에 앉아 시끄럽게 떠드는 정도에 머무는 사람.

그래서 나는 내게 '잘' 표현할 능력과 용기가,

그 이전에 더욱 치열한 질문이 아직 부족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위로와 반성을 동시에 얻게 하는 작가의 글 덕분에

나는 이번에도 한 걸음,

아니 열 걸음쯤 문제를 지고 걸을 힘을 얻었다.


작가의 말처럼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에 성실한 가을과 겨울이 되었으면 한다.

이다음 내게 찾아올 순서가 무엇이든 맞닥뜨릴 나를 만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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