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터울 남동생이 있다. 나보다 작았던 동생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키도 몸도 커졌다. 어느 날 작은 갈등으로 시작한 말싸움에 동생이 욱한 순간 위협적인 손동작과 화가 터져 나왔고, 순간적인 상황에 얼어붙은 몸의 기억이 여전히 내 신체에 각인되어 있다.
20대 초반의 어느 새벽 무렵 애인과 통화를 하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애인이 사소한 갈등에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었다. 분명 눈 앞에 상대가 없었는데도, 목소리만으로 전해져 온 상대의 '화'에 순간 당황해 몸과 입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갑자기 입은 화에 대한 당황스러움과 억울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무엇보다도 소리만으로 전해져 온 위압감에 얼어붙은 나 자신에 대한 당혹스러운 마음이 가장 컸다.
두 사건 이후로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상대에게 '화내지 말 것'을 조건으로 협상하며 관계를 시작했다. 이성애자 정체성이 강한 나는 주로 남성과 연애를 해왔는데, 물리적인 힘과 크기에서 오는 차이에 대한 위력들이 그 시간들만큼 몸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 차이들을 인지하며 여성으로 길러지며 단련되지 못한, 훈련되지 못한 신체적 제한과 움직임들이 어떤 무력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 더 '설치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들이 더 많았다면 이 무력감은 없지 않았을까. 성인 이후 삶의 여러 궤적들을 훑어보며 페미니스트로 정체화를 한 나에게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부분은 이 '무력감'과 '얼어붙음'이라는 감각이었다. 조신함, 나약함, 여리여리함을 여성성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신체를 단련하고 발달할 기회조차 불평등하게 주어지는 현실에서 어쩌면 내가 가진 '무력감'과 '얼어붙음'은 여성으로 만들어지며 신체에 붙은 표상과도 같았다. 젠더 규범은 신체적인 무력감을 자동적으로 학습하게 만드는 기제였다.
최근 우연히 듣게 된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은 무력감에 익숙해진 나의 방식들이 구조적인 폭력 안에서 구성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은 1960-70년대 미국의 반성폭력 운동의 흐름에서 태동했고, 단순히 신체를 보호하는 호신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젠더폭력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무력함과 신체의 활동 반경을 키우는 것은 단순히 호신술을 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얼어붙음'의 상황을 깨고 신체를 크게 움직이며 대응 에너지를 외부로 표출할 수 있는 반복적인 경험이 중요하다. 반복적인 경험으로 방어에 대한 기술들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체득할 때 비로소 자기 방어가 실현 가능한 개념이 된다. 이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폭력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복합적인 맥락들을 읽어내고,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몸에 체득되지 않은 기술들을 바로 현실에서 적용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폭력의 순간에 얼어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심호흡을 하고, 생각을 하고,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기술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수반되는 변화들이 있다. 협상만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선택했던 나에게 이 훈련은 꽤나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협상이 아니더라도,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얼어붙는 나의 물리적 반응을 인정하고, 숨을 고르고, 말을 내뱉고, 몸을 움직이는 역동들이 나에게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교육 시간에 강사님은 애인들과의 협상에 대한 내용을 듣고 그것 또한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여성을 향한 대다수의 폭력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상대를 설득하고 조율할 수 있는 조건들을 제시하고 협상을 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이라는 근본적인 상황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작은 위안과 앎을 얻어간 문장들을 기록하고자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