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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토리 Jan 21. 2022

[세자매] 불편함을 직시해야 할 의무


이은선 영화평론가는 “가족은 평생 분리 불가능에, 개인의 인생에 전방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독한 인연의 집단”이라고 했다. 깊은 사랑과 유대를 처음으로 배우는 1차 집단이자 동시에 보이지 않는 깊숙한 혈흔을 새길 수 있는 관계성을 지닌다. 가족은 서로 다른 차이와 관계 속 상처, 차이들을 어떻게든 봉합하여 유지해야 하는 그런 특수한 관계이다. 물리적으로는 거리를 두어도 나도 모르는 새 이어받은 특질들과 성향들에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잔흔들을 수용하게 되는 특수한 관계.  


가부장이라는 이름의 폭력과 자기혐오

영화 <세자매>는 가족구조 안에서 가부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과 학대가 남긴 잔흔들이 개인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그려낸다. 그 폭력 속에서 생존한 세자매는 각각의 맥락에서 너무나 지독하고 징그러운 존재들이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사랑을 주지도 못한다. 거기서 오는 자괴감은 각각 분노로 혹은 포기로 혹은 삶에 대한 타협으로 다르게 작동한다.


둘째인 미연은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캐릭터로 가부장이 자신의 폭력을 용서받기 위해 택한 종교적 신념을 충실히 따르며, 대외적으로 부러울 것 없는 정상가족의 외현을 유지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를 유지하기 위해 미연이 참아야만 하는 분노와 혐오감은 동시에 가족 내 가장 약한 존재인 자신의 딸에게로 향하고 미연은 그때마다 다시금 자신에 대한 분노와 혐오감을 느낀다. 미연이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집안에서 배게를 움켜쥔 채 고개를 처박고 소리를 지를 때이다. 남편의 언어적, 정서적, 물리적 폭력에도 미연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를 절제하고 우회하며 적절한 타협과 전략으로 삶을 살아낸다.  


전가되는 죄책감과 폭력

폭력을 행한 사람이 사과를 하지 않을 때 혹은 너무 쉽게 자신을 용서할 때 가해자가 가져야 하는 죄책감은 구조의 또 다른 피해자이자 약자에게 전가된다. 사랑을 가르치지 않은 자, 폭력을 행한 자, 이를 방관한 자들은 너무 쉽게 자신을 용서해서 남겨진 자들의 허무함은 어떻게 말해져야 하고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폭력의 가장 큰 피해자인 첫째 희숙은 반복되는 물리적 폭력 앞에서 저항에 대한 에너지를 상실당한 존재가 된다. 희숙은 주변이들에게 착취당하는 존재이자 혐오의 존재로 자리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너무 쉽게 자신을 용서하는 가해자에게 남은 허무함. 그 지점에서 오는 불평등과 분노, 방어기제, 삶에 대한 태도가 세자매를 통해 입체적으로 드러나기에 이 이야기는 너무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더 모두가 주목해야만 한다.


폭력의 잔흔은 시대에 따라, 공간에 따라, 관계에 따라 전환되고 확대되고 변모한다. 따라서 폭력에 대한 민감성과 감수성은 폭력의 전환과 확장,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을 사회가 얼마나 의제화하는가, 피해자의 말을 얼마나 잘 듣고 있는가에 따라 분명 달라진다. 경청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고, 방관은 또 다른 이름의 가해이기에. 따라서 우리는 때때로 분노 혹은 불편함, 회피를 직시하고 기억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우리에게 사과하라”라고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말할 때, 그 곁에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늘어난다면. 그럼 영화 속 세자매는 더 빨리 서로를 향해 웃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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