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다녀온 휴가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겹쳐 올해는 단 하나의 상영작도 보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휴가를 마친 그때, 부산여성의전화에서 진행하는 영화제의 링크를 애인이 보내주었다. 얼른 집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누워 작품들을 감상했다. 그중 <기대주>는 가장 흥미롭게 본 작품 중 하나였다.
평소 즐겨다니던 체육센터에서 명자는 아마추어 수영대회의 팀원을 뽑는 시합에 참여하고, 중학생 소녀 지유와 최종 엔트리에 오른다. 더 어리고 앞길이 창창한 지유에게 팀원 자리를 양보하라는 사람들의 압박이 들어오지만, 명자는 팀원의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않다.
미디어가 재현하는 중년여성들의 역할은 항상 자식들을 포용하고 희생하는 모습, 돈과 명예에 집착하여 자식의 행복을 훼방놓은 모습, 탐욕적이고 안하무인적인 모습이 전부였다. 그들은 자식들의 욕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사모님'으로서 허용된 소비주의적 자본만을 욕심내야 하는 제한된 존재였다. 더 큰 부와 명예, 성공을 탐내는 중년여성들은 모두 불행한 최후를 맡았다. 일과 취미, 성공, 명예에 대한 욕망은 주로 그들의 자식으로 그려지는 젊은 20대 남성에 허용되는 주제였고, 그들의 위치와 욕망은 사장님을 내조하는 사모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선생님'과 '사장님' 등 다양한 호칭을 지닌 중년남성들과는 다르게 중년여성들에게는 '아줌마'와 '어머니'라는 호명밖에 제공되지 않는다. 이때 명자는 소박한 자신의 공간을 취향껏 가꾸고, 자기 자신을 위해 장을 보며, 멋진 한 상을 차려낸다. 때로는 토스트와 짬뽕 한 그릇으로 소소한 재미를 누린다. 그의 삶의 중심은 타인이 아닌 '자신'이 있다. 결과에 상관없이 한 명의 주체로서 시합에 참여하는 것, 그 어떤 편견없이 한 명의 주체로서 작은 성취들을 맛보고 자신의 일상을 가꾸는 것은 모두 명자가 자신의 일상과 삶의 중심에 '자신'을 놓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삶의 중심이 타인을 향해 맞추어져있는 존재들에게 성취와 돌봄은 자기 자신을 위한 주체적인 이슈가 되기 어렵다.
책『새벽 세시의 몸들에게』에서 '몸'과 '시간/성'은 상대적으로 젊은 육체를 지닌 존재들이 지각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유한한 삶을 사는 주체들에게 '몸'과 '시간/성'은 자신의 유한성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축이다. 그러나 몸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 시간성은 너무 추상적이고, 시간/성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 몸은 너무 생리학적이다.(p.259)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건강', '젊음', '노년'이라는 카테고리는 이러한 유한성과 상대적인 시간성 앞에서 허용되는 것과 금지되는 것, 욕심내야 할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의 경계를 설정한다. 인생을 더 길게 살았고, 상대적으로 더 늙은 몸을 지닌 명자는 인생을 더 짧게 살았고 상대적으로 더 젊은 몸을 가진 지유에게 승리와 성공에 대한 욕망을 양보해야 한다는 억압을 받는다.
대학생 시절 마트에서 일하며 만난 수많은 중년여성들은 '얼른 죽어야지', '다 늙어서 뭔', '늙은이가 왜 저래'라는 말들을 서로를 향해 자신을 향해 자주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직업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와 성취에 대해 적극적이고도 노골적인 욕망을 표출했다. 자신이 맡은 물건을 잘 팔기 위해서,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서, 일을 잘한다고 인정받기 위해서, 계약을 연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성공과 성취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성공은 큰 부와 명예를 가져오는 거대한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아주 소소한 성공과 성취들을 마주한다. 이것은 곧 자신의 삶에 중심에 자신 그 자체가 있다는 것, 주체적인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이런 작은 성취와 성공들은 중년여성들에게 허용되지 않을까? 그들은 왜 항상 타인의 성취와 성공을 위해 희생하고 배려해야만 하는 존재로 그려질까? 그들이 표출하는 욕망은 왜 '다 늙은 여성들이 주책맞게 표출하는 탐욕'이 되는 것일까?
여성혐오는 멀리 있지 않다. 여성들이 어떤 욕망을 가지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 욕망을 가진 여성을 비난하는 것, 제한된 욕망만을 허용하는 것, 젊지못한 육체를 비난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희생자의 위치로 포지셔닝하는 것. 이러한 일상적인 장치들이 곧 여성혐오의 정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