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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니에드만 May 04. 2018

[여는글] 이번 생은 망했군요^^

이제 막 퇴사한 前 신문기자의 폴란드 여행기 


어디서 차단기를 내려서 진로를 바꿔야할까?
I'm pretty much fucked up. That's my considered opinion.  Fucked.

아무래도 X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X됐다

영화 <마션>의 원작, 앤디 위어의 SF소설 <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첫 3문장입니다. 화성을 탐사하다가 고립된 맷 데이먼(마크 와트니 역)이 내뱉은 탄식을 출간된 원문과 번역문을 그대로 살려 옮겼습니다. X는 다들 생각하고 있는 그 단어가 맞습니다.


미술판과 광고회사,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6년간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슬프게도, 제가 내린 결론도 마크 와트니와 같네요. 


‘아무래도 X됐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난 정말 X됐다.’ 


한국에서 한때 유행하던 말로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쯤 되겠죠. 도무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앞날을 생각하면 누구나 막막한 게 인생이라지만, 방책을 찾아보지도 않고 내린 게으른 판단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판단의 근거가 필요하겠죠. 


앤디 위어의 소설 <마션>의 미국판 표지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겠군요. 돈입니다. 돈 때문에 사는 건 아니지만 돈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럼 돈을 벌면 되지 않냐고요? 문제는 지금처럼 벌어선 답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더 벌면 답이 나올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더 문제죠. 더 벌 능력도 없고, 번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는 것


지난 6년간 모은 돈에 7배를 곱하면 서울 변두리에 자그마한 집 하나 구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더군요. 물론 여기에도 2가지 전제가 따라 붙습니다. 5년 뒤 집값이 지금과 같아야 한다는 것과 이전 5년보다 더 악착같이 살아야한다는 것. 그것도 향후 30년을. 아휴, 그렇게는 못 살겠습니다.


저의 최종판단을 한 선배에게 털어놓으니, ‘내 집 마련’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지 않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본인도 따지고 보면 ‘내 집’이 아니라 ‘은행 집’이라고. 다들 원리금 갚으며 빠듯하게 산다고. 부모님 도움 받는 게 이젠 부끄러운 세상이 아니라고. 


타당한 말씀입니다. 신뢰하는 선배라 조언을 한참 귀담아 들었습니다. 재테크 전략까지 세워주셨죠. 그러고도 전 결국 ‘다른 분들은 다 그렇게 해도 전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도움 받을 돈도 없습니다. 있는 척 하시지만 없다는 거 다 압니다.

결국, 돈이 문제다


재능도 없는 재테크에 쩔쩔매면서, 혹은 매달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월급을 받으며 원리금 갚고 살기엔 저의 한번 뿐인 인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러기엔 세상에 재밌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아예 몰랐으면 버틸만도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20대 대부분을 문화 낭인으로 살면서 듣고 보고 배운 재미가 너무 많네요. 재미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인데 그것들을 놓치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는 안 그러고 싶냐고 물을 것입니다. 문화생활하면서 여유롭게 사는 게 인생의 목표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불안합니다. 지금 모아둔 돈 다 쓰면 어디선가 일을 구해 다시 돈을 벌어야 할 테니까요. 그래야 또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문(文)송’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현 시대에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이따금 거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옵니다. 그래도 이렇게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건, 제가 더 이상 잃을 게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는 뭘 누리고 살았나 싶기도 하고요.


지난 1달간 신변을 정리했습니다. 직장을 접었고, 저축과 보험을 깼고, 주식을 매도했고, 융자 낀 오피스텔도 팔았습니다. 다 현금화했습니다. 합해봐야 이 정도라니! 액수를 보고 눈물이 조금 날 것도 같았지만, 잠시 숨을 돌릴 정도는 될 것 같았습니다.


딱 1달. 


동유럽 중 폴란드를 선택한 건 아우슈비츠 때문입니다. 홀로코스트 관련해선 강박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읽곤 했는데, 현장에 갈 기회를 만들지 못해서 늘 가슴 한켠이 허전했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쥔 나약한 한 인간이  내면의 공허함을 다스리지 못하고 나르시시즘에 투항할 때, 인간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 사소한 행위라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늘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이 질문을 붙들고 있습니다.


"바르샤바(7일)-쳉스트호바(1일)-크라쿠프(7일)-자코파네(4일)-브로츠와프(4일)-카토비체(1일)-그단스크(8일)" 


아우슈비츠 이외에도 폴란드 대학가 풍경도 궁금하네요. 우선 바르샤바 대학부터 들러야겠죠. 김애란 작가가 지난해 이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했다고 하니 더 가보고 싶어지네요. 지난해 1월 세상을 떠난 사회학계 거장 지그문트 바우만의 흔적도 찾아보려 합니다. 


제 2의 수도라 불리는 크라쿠프에선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대표 시인 쉼보르스카가 다녔던 야기엘론스키 대학에 가보려 합니다. 코페르니쿠스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이 대학에서 수학했다고 하네요. 대학 주변을 서성일 때 여전히 가장 가슴이 설렙니다.


폴란드 현대미술은 어디까지 왔는지도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가는 곳마다 미술관은 필수코스니까요.

 

해당 도시에서 느낀 감상을 꾸준히 올리려 합니다. 감상이지 역사가 아닙니다. 역사는 폴란드 관련서에 이미 다 나와있겠죠. 여행에서 인생의 답을 찾는 우를 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행에서 찾을 수 있는 답은 제가 사는 한국에서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지금 제가 갈 수 있으니까 가는 것이고, 생각이 나니까 적는 것입니다. 


길든 짧든, 기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어야 여행도 다채로워집니다. 물론 여행의 하이라이트만 편집해 올리는 꼼수는 쓰지 않겠습니다. 예컨대, 폴란드 어린이의 맑고 순수한 눈동자 운운하는 부류의 감상 말입니다. 아마도 여행이 얼마나 지지부진한가가 줄기를 이룰 것 같네요. 제 서툰 성품이 어디가겠습니까. 


재밌으면 계속 읽어주시고, 아니면 가볍게 넘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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