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1> 이코노미석 살아남기

이제 막 퇴사한 前 신문기자의 폴란드 여행기 1.

by 토니에드만
28576946_577918572558275_2946322873289015296_n.jpg 11시간의 비행. 바르샤바에 다 와간다.

새 학기 초미의 관심사는 단연 우리반 담임 선생님이 누가 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분이 교실 문을 여는 순간 그해 우리들의 표정도 거의 결정났었으니까. 여행에도 그런 순간이 있는 것 같다. 이코노미석으로 10시간 이상 날아가는 장거리 비행에서 옆자리에 누가 앉느냐 하는 문제는 여행의 질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해서, 공항으로 가는 동안 기도했다.


‘내 옆 좌석이 비어있기를, 그게 아니라면 얌전한 사람이기를. 이뇨작용이나 장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사람이기를!’


“출장가는 건가요?”

옆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다. 폴란드 바르샤바를 경유해 체코 프라하로 갈 거라는, 등산복을 위 아래로 갖춰 입은 50대 부부가 내 좌석 창가쪽에 나란히 앉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여행간다’고 짧게 돌려줬다.


그때부터 질문 폭탄이 쏟아졌다. 젊은 총각이 어떻게 시간을 냈나, 얼마나 있을 건가, 전에 무슨 일을 했나 등등. 신문사에서 일했다고 했더니, 더 열이 오르셨다. 각종 현안에 대한 일장연설과 훈시가 이어졌다. ‘하...잘못 걸렸다.’


수습기자 시절, 거리에서 소속을 밝히기만 하면 열을 내면서 놔주지 않던,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피곤하다는 내색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말로 확실하게 거부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번 여행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갈등을 애초에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갈등에 지쳤다.


싫든 좋든, 이들과는 11시간 비행을 같이 해야했다. 의도적인 침묵이나 단호한 거절로 빚어질 미묘한 긴장 기류를 그 오랜 시간 좁은 공간에서 난 버텨낼 수 없었다. 감정적으로 이미 많이 닳아 버린 상태로 준비하기 시작한 여행이었다.

piglet-3275703_1920.jpg 갈등에 지쳤다.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혼자 있고 싶어.


장거리 이코노미석 비행처럼, 자신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극도로 제한된 공간에서는 자기 영역에 대한 경계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다. 이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블루 재스민>에서 케이트 블란쳇(재스민 역)은 화려했던 맨해튼 생활을 정리하고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오르는데, 그녀는 비행 내내 자신의 옆 좌석에 앉은 할머니에게 신세 한탄을 한다. 재스민의 인생사를 그대로 받아주던 할머니는 헤어지면서야 본심을 드러낸다. 정말 힘든 비행이었다고!!!!! 기내식을 먹은 뒤 부부는 잠이 들었다. 나도 지쳤다. 기내에서 읽으려고 준비해온 책은 펼치지도 못했다. 장시간 비행에 대비해 들고 가는 책은 전날 얼마나 신중을 거듭하면서 설레는 마음 속에 고르는가 말이다!!


28783179_577918509224948_6179359221885173760_n.jpg 폴란드 바르샤바 중심가에 위치한 문화과학궁전


우연을 받아들이는 것이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지만, 난 아직 이런 불운까지 껴안을 도량은 아닌 것 같다. 밀란 쿤데라 선생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무의미의 축제>에서 그랬다.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우연과 무의미를 만끽하라고.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아직은 머리로만 이해 가능한 말들인가 보다. 내 현실은 또다른 우연처럼 다가올 필연에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컨대, 바르샤바 도미토리에서 만날 룸메이트가 심한 코골이거나 예의 없는 사람이면 어쩌지 등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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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 두 단어가 필생의 탐구 주제였던 우디 앨런과 밀란 쿤데라의 작품 세계에서 내가 공통으로 추출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었다.


작품 속 인물은 내적 합리성을 가진 필연을 가지고 행동하지만 인물을 둘러싼 상황은 철저히 우연에 복무한다. 인물들에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 둘 사이의 줄다리기, 그러니까 우연과 필연의 적절한 배합과 긴장. 그것이 인생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들의 추종자인 나 역시 그 긴장을 즐기면서 살고 싶지만 잘 되질 않는다. 그들은 독자를 수수께끼에 빠뜨려놓고 저 멀리서 웃고 있는 것만 같다. 이번 여행은 어떤 우연과 필연의 조합으로 짜여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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