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퇴사한 前 신문기자의 폴란드 여행기 1.
새 학기 초미의 관심사는 단연 우리반 담임 선생님이 누가 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분이 교실 문을 여는 순간 그해 우리들의 표정도 거의 결정났었으니까. 여행에도 그런 순간이 있는 것 같다. 이코노미석으로 10시간 이상 날아가는 장거리 비행에서 옆자리에 누가 앉느냐 하는 문제는 여행의 질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해서, 공항으로 가는 동안 기도했다.
‘내 옆 좌석이 비어있기를, 그게 아니라면 얌전한 사람이기를. 이뇨작용이나 장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사람이기를!’
“출장가는 건가요?”
옆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다. 폴란드 바르샤바를 경유해 체코 프라하로 갈 거라는, 등산복을 위 아래로 갖춰 입은 50대 부부가 내 좌석 창가쪽에 나란히 앉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여행간다’고 짧게 돌려줬다.
그때부터 질문 폭탄이 쏟아졌다. 젊은 총각이 어떻게 시간을 냈나, 얼마나 있을 건가, 전에 무슨 일을 했나 등등. 신문사에서 일했다고 했더니, 더 열이 오르셨다. 각종 현안에 대한 일장연설과 훈시가 이어졌다. ‘하...잘못 걸렸다.’
수습기자 시절, 거리에서 소속을 밝히기만 하면 열을 내면서 놔주지 않던,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피곤하다는 내색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말로 확실하게 거부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번 여행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갈등을 애초에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갈등에 지쳤다.
싫든 좋든, 이들과는 11시간 비행을 같이 해야했다. 의도적인 침묵이나 단호한 거절로 빚어질 미묘한 긴장 기류를 그 오랜 시간 좁은 공간에서 난 버텨낼 수 없었다. 감정적으로 이미 많이 닳아 버린 상태로 준비하기 시작한 여행이었다.
장거리 이코노미석 비행처럼, 자신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극도로 제한된 공간에서는 자기 영역에 대한 경계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다. 이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블루 재스민>에서 케이트 블란쳇(재스민 역)은 화려했던 맨해튼 생활을 정리하고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오르는데, 그녀는 비행 내내 자신의 옆 좌석에 앉은 할머니에게 신세 한탄을 한다. 재스민의 인생사를 그대로 받아주던 할머니는 헤어지면서야 본심을 드러낸다. 정말 힘든 비행이었다고!!!!! 기내식을 먹은 뒤 부부는 잠이 들었다. 나도 지쳤다. 기내에서 읽으려고 준비해온 책은 펼치지도 못했다. 장시간 비행에 대비해 들고 가는 책은 전날 얼마나 신중을 거듭하면서 설레는 마음 속에 고르는가 말이다!!
우연을 받아들이는 것이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지만, 난 아직 이런 불운까지 껴안을 도량은 아닌 것 같다. 밀란 쿤데라 선생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무의미의 축제>에서 그랬다.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우연과 무의미를 만끽하라고.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아직은 머리로만 이해 가능한 말들인가 보다. 내 현실은 또다른 우연처럼 다가올 필연에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컨대, 바르샤바 도미토리에서 만날 룸메이트가 심한 코골이거나 예의 없는 사람이면 어쩌지 등등의.
우연과 필연. 두 단어가 필생의 탐구 주제였던 우디 앨런과 밀란 쿤데라의 작품 세계에서 내가 공통으로 추출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었다.
작품 속 인물은 내적 합리성을 가진 필연을 가지고 행동하지만 인물을 둘러싼 상황은 철저히 우연에 복무한다. 인물들에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 둘 사이의 줄다리기, 그러니까 우연과 필연의 적절한 배합과 긴장. 그것이 인생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들의 추종자인 나 역시 그 긴장을 즐기면서 살고 싶지만 잘 되질 않는다. 그들은 독자를 수수께끼에 빠뜨려놓고 저 멀리서 웃고 있는 것만 같다. 이번 여행은 어떤 우연과 필연의 조합으로 짜여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