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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니에드만 May 05. 2018

<폴란드5> 당신은 왜 기자가 아니란 말인가

이제 막 퇴사한 前 신문기자의 폴란드 여행기 5. 

바르샤바는 앞으로도 ‘밝은’ 도시가 되긴 어려울 것이다. 


이틀 전 찾은 문화과학궁전 전망대(우리로 치면 63빌딩 전망대 정도 되겠다)에서 내려다본 바르샤바 일대엔 낮은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2km쯤 떨어진 구시가조차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곳은 비가 대중없이 내리는데, 세차게 오진 않고 잔비가 꾸준히 내린다.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대신 모자를 쓴다. 공기가 탁함에도 먼지 섞인 비를 그냥 맞는다.

바르샤바 가장 높은 곳, 문화과학궁전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 ⓒ토니에드만

‘밝은’ 도시를 기대하기 힘든 건 물론 날씨 탓만은 아니다. 트램과 버스가 정신없이 오가는 사이로 대학생들이 활보하고, 멋진 옷차림의 중년 노년 부부가 손을 잡고 쇼핑을 한다. 질서정연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4일째 유심히 지켜본 이곳 시민들의 표정은 평균적으로 밝지 않았다. 


유머와 웃음을 몰라서가 아니다. 도시 전체를 무의식적으로 짓누르는 역사의 무게와 기억, 책임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보니 이들의 표정엔 어딘가 결정적인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상실감이 이따금 묻어나온다.  

길 밖으로 도드라져 나온 석재료가 다듬어지지 않은 채 놓여있다 ⓒ토니에드만

실제로 바르샤바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바르샤바의 거의 모든 건축물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복구사업으로 재건된 것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소련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이곳은 시민들의 눈물겨운 재건 노력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구시가 야경은, 체코 프라하의 야경만큼 경쾌하고도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나른하면서도 진지한 빛깔을 지닌 정제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바르샤바 민중봉기 박물관 ⓒ 토니에드만

물질은 잃어버렸지만 기억은 보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록에 대한 고집 말이다. 바르샤바 시민들이 전쟁 전 모습 그대로 도시를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1770년 폴라드 왕 스타니수아프 2세가 고용한 베니스 출신 화가 벨로토가 그린 수많은 바르샤바 풍경화 때문이다. 시민들은 융단 폭격 속에도 살아남은 이 풍경화를 토대로 번영기의 바르샤바를 다시 지어낼 수 있었다.

상실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저항에 대한 기억도 역사에 남겼다. 구시가 일대 건축물 1층 외벽엔 아직도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길 밖으로 도드라져 나온 석재료도 다듬지 않았다. 층층마다 다른 건자재가 맞부딪혀 빚어낸 부자연스러운 이음새도 숨기지 않았다. 전부 보존하고 드러냈다. 폐허를 깔끔하게 밀어내고 다시 세운 도시가 아니다. 폐허를 간직한 채 쌓아올린 저항의 도시다. 비록 그들은 피해자였지만, 역사의 긴 물줄기 속에서 기억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파비악 감옥 박물관 ⓒ 토니에드만

희생을 헛되이 해서는 안된다는, 역사의 증인이 돼야한다는 이들의 강고한 신념은 1944년 일어난 민중봉기가 남긴 자료들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오늘 찾은 <바르샤바 민중봉기 박물관>은 그 기록들을 집대성해놓은 곳이었다. 바르샤바 시민들은 2차대전 막바지였던 1944년 대대적인 저항운동을 계획한다. 독일군의 패배가 짙어져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는 바람에 20만여명의 시민들이 독일군에 목숨을 잃었다. 저항운동 2달간 독일군은 더 철저하게 검열했고, 무차별적으로 사살했다.

바르샤바 민중봉기 박물관 ⓒ 토니에드만

언론 통제 속에 독일군의 지원을 받는 황색 언론이 40여개 등장했다. 독일군을 옹호하는 칼럼과 기사를 게재한 신문만이 검열을 통과해 출판될 수 있었다. 시민들과 지식인들은 물밑에서 저항했다. 2달간 140여개의 지하 독립언론이 구성됐다. 독일군에 포위된 시민들이 외부 세계와 접촉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박물관 자료집은 “그 기록들을 돌려 읽으며 시민들은 긴 어둠을 버틸 수 있었고 폴란드 해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박물관엔 당시 신문을 찍어냈던 프레스기가 당대를 증거하듯, 상처를 간직한 채 놓여있었다.


수습기자 시절, 가혹할 정도로 빡빡한 경찰 기자 생활에 대한 고통을 팀장(언론사에선 이를 ‘캡’이라고 부른다)에게 전한 적이 있다. 그때 들었던 팀장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기자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때문에 정확해야 한다고. 정확하려면 힘들 수밖에 없다고. 역사의 증인이 된다는 긍지로 살자고. 


물론 이제 기자직도 내려놓았지만, 그것이 꼭 직업이 아니어도 1944년 그들이 그랬듯 정확하게 기록하는 사람은 모두 기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SNS가 전면화한 시대에선 더 그렇다. 그곳이 어디든, 어떤 상황이든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은 숭고하다.


*오늘 밤도 약간의 맥주가 필요하다. 파비악 감옥 박물관까지 보고 왔더니 후유증이 좀 있다.
*오늘은 진지한 기행기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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