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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하 Jan 14. 2024

너를 떠나보내다

건강한 관계 맺기


어느 해, 부분 일식



생을 살다가, 영혼과 영혼이 맞닿으며 그 무게까지 가늠이 될 것처럼 교감이 되는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는 완전한 기쁨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완전한 기쁨이라는 것이 어느 날은 완전한 슬픔으로 다가오는 순간도 있다. 봄날의 활짝 핀 꽃들이 그러한 기쁨을 주었다가 사위어가는 것처럼, 인연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썰물처럼 떠내려간다면 그것은 슬픔 이상의 것으로 각인되어버린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분명히 소통이 잘 되었었고, 믿었다. 그런 인연이 어느 날부터 아주 멀리 저 건너편에 서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럼, 내가 움직이면 될까. 이미 썰물 되어버린 인연은 되돌릴 수 없게 멀어져 버렸다.


수년 전, 새롭게 참여했던 모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매혹적이었다. 사람들 틈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인사 정도의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나 그 눈빛 속에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봤다는 야릇한 전기적 교류가 흘렀다. 이상도 하지, 이성을 만나 연애할 때처럼 설렘이라는 동요가 일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만 하고 있을 때 그녀에게서 메일이 왔다. 커피 한잔하고 싶다며 만나자고 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녀와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나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어버렸다. 살아오면서 친구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깊은 내면도 그녀에게만큼은 활짝 열어보였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면서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자란 친자매 같은 친밀감으로 사랑과 신뢰를 두텁게 쌓아갔다. 우리가 나누었던 세계는 커다란 우주이며 그 자체였다. 우리의 대화는 정점에 다다르는 순간엔 서로의 영혼이 감지될 것 같은 찰나를 느끼게 해 주었고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동반하게 해 주었다. 천사가 날아들 듯 아름다운 눈짓으로 하나의 영혼이 나의 심연에 내려앉았음을 신에게 감사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목소리와 눈빛에서, 예민한 스침처럼, 무엇인가가 직관적으로 감지되는 순간이 있었다. 그녀는 그런 말을 잘했다. “너만 알고 있어” “너한테만 이야기할게” “너는 나한테 바위 같은 존재야”  워낙에 마음을 열었던 터라 그녀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들에 믿음이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런 말속에 함정이 있음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모임에서 알게 된 다른 친구와 언니들과 접하게 되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중에 우연찮게 알고 보니, 그녀는 다른 친구에게도 나한테 한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접근했으며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상대의 허물을 들춰내며 일방적으로 소통을 끊어 버리는 배신을 한다든지, 아님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 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는 식으로 다중적인 행동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결국 그녀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은 채로 그녀를 내 마음에서 떠나보내며 여러 달 동안 가슴이 쓰리도록 아팠다. 나는 뒤늦게, 친구라는 개념을 차분히 정리해 보려 했고, 그 과정에서 심리학책을 뒤적이기도 하고 철저하게 혼자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 했다. 그러면서 가까이 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나르시시즘을 갖고 있다. 그것이 건강한 자기애인지, 건강하지 않은 자기애인지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었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 그러나 그것이 건강하지 않은 나르시시즘으로 나타날 때 주위 사람들은 휘둘린다. 나르시시트들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고 때로는 멋있게 보여서 그런 사람이 상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낼 때는 자신도 모르게 도취된다. 그랬구나, 이 또한 나도 그런 부분,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하려다가 범하는 오류, 과장된 표현들에만 서로에게 도취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는 그녀가 왜 그랬는지는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건강치 않은 나르시시즘을 발견하고 반성하기에 이르렀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긍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있어서 개별성을 인정하고 완전히 흡수되지도 않으며, 흡수되더라도 타인과 건강하게 분리되고 경계 짓는 일이 필요하다고 한다. 너무 많은 것, 시시콜콜 비밀 없이 공유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밀착된 질량으로 제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견디지 못하여 녹이 슬고, 권태가 스며들면 장점보다는 허물들이 녹슨 그릇처럼 너덜너덜 달라붙는다. 녹이 슬고 더 채울 수도 없는 그릇은 포화된 상태로 그릇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넘치면 비워내야 하고 비워지면 다시 채워야 하는 게 제대로 된 그릇의 역할인 것처럼 아무리 소통이 잘 되는 친구라도 마음을 채우고 비워내는 데 있어서 일정한 간격과 반복적인 거리가 주는 절제의 덕이 필요한 거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더 이상 그녀가 밉지 않았다. 그녀와의 소통이 진실이든 아니든 내가 한순간이라도 느꼈던 기쁨과 미워하며 슬퍼했던 순간도, 한걸음 밖에서 나를 돌아보고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내게는 참으로 귀한 인연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제, 그녀를 완전히 떠나 보내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과장하지 않고, 건강하게 만나야겠다는 다짐도 한다. 있는 그대로 마주 할 수 있는 용기와 직관적인 안목이 피어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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