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산책자로 거듭나기
매일 걷고 있다. 어제도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만 오천보를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나는 평소에 운동과는 거리가 먼 저질 체력이었다. 처음 얼마동안에는 만보를 걷고 나면 다리가 아파서, 그다음 날까지 통증이 있었다. 매일 만보를 걸으며 일 년을 보내고 나니, 근력이 붙었다. 이제는 속도를 내고 걷기까지 한다. 어제는 기온이 영하 15도를 밑도는 날씨여서, 걷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걷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오늘은 걷지 말아야지, 마음먹었다가 변덕스럽게 마음이 변해서 꽁꽁 싸매고 또 걸었다. 찬 공기가 양볼과 코를 베일 듯이 때려 주고 속눈썹까지 얼어붙게 한다. 그렇지만 시베리아나 알래스카를 걷는다는 상상을 하며 걸으니, 그래도 걸을만했다. 제대로 된 <외투> 하나 없어서 추위에 벌벌 떨던 아카키도 걷지 않았던가. 새삼,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기도 한 거라. 외투 하나 때문에 시름시름 앓아야 했던 아카키의 영혼을 위로하며 바싹 마른 낙엽을 밟으니, 사그락, 그의 절규가 들리는 듯도 했다. 누구라도 아카키처럼 안타까운 죽음을 맞지 않기를, 기도한다.
사실 나는, 사유하며 걷는 도시산책자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수많은 문학인들과 철학자들이 걸으면서 사유한다고 하였을 때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던 나였다. 오로지 걷는 게 목적이었던 나는, 걷는 것조차도 힘이 들어서 정작 아무 생각도 못하고 걸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점점 잘 걷게 되면서 주변을 환하게 둘러보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걷는 길의 사계절을 모두 겪어내면서 비로소 땅에 발을 붙이고 서있는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경계와 경계를, 하늘과 땅 사이를, 그렇게 고요하고도 굳건히 서 있는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더 이상 피상적이지 않고 진짜 또 다른 '나 자신'이 되는 희열이 동반된다. 마치 껍질을 벗은 또 하나의 나를 마주한 격이었니, 대단한 수확물을 거둔 것처럼 마음 가득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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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 멀리 가경이 펼쳐진다. 시베리아 같은 공기층을 뚫고 아슴아슴한 노을이 마른하늘에 수를 놓아준다. 노을빛을 가슴속에다 길게 엮어 가지고 들어 와서, 오징어 볶음을 뻘겋게 만들어서 먹었다. 몸이 녹진해진다. 여여한 밤을 보내고 깊게 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