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인형이 바다로 간 까닭은?
소금인형이 바다로 간 까닭은?
류시화 시인의 소금인형이란 시를 읽어보신 적 있나요? 안치환 가수가 노래로도 만들었지요. 뜬금없이 웬 소금인형이냐고요? 일단 한 번 읽고 시작하겠습니다.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요가가 하나로 묶는다는 뜻이라고 이미 밝혔지요. 묶음, 묶기, 결합, 합일, 연결 등 의역하면 수많은 단어들이 끌려 나올 겁니다. 자역한 게 유가(瑜伽)지요. 결합은 분리되어 있는 둘 이상의 대상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야 결합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니까요. 그렇다면 요가가 하나로 묶으려고 한 게 무얼까요? 정말 소 두 마리를 멍에 씌워 묶으려는 걸까요? 그건 아니겠지요?
결합의 한 축은 당연히 '나'입니다. 나를 제외하면 그 어떤 철학적 논의도 무의미해지니까요. 따라서 내가 뭔가와 결합하겠지요. 나는 존재합니다. 몸을 통해 존재하지요. 그리고 몸을 경계로 '나'와 '내가 아닌 것'이 구분됩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아닌 것'과 따로 떨어져 존재한다는 분리 감이 마음속에 형성되지요.
항아리를 경계로 항아리 안의 공간과 항아리 밖의 공간이 나뉘듯이, 몸을 경계로 안팎으로 두 세계가 각각 펼쳐집니다. 나의 세계와 내가 아닌 세계 즉, 내면세계와 외부세계가 펼쳐지지요. 우선 눈을 들어 바깥을 살펴볼까요. 거기에는 땅과 바다, 해와 달, 별과 은하수 그리고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우주가 있습니다. 눈을 돌려 내면을 들여다보면 어떻습니까? 거기에는 온갖 생각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욕망과 좌절의 파도가 일렁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걸 담고 있을뿐더러,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주의 까마득함마저 담고 있는, 그리하여 벅찬 감동과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이 광대무변 성을 브라흐만(brahman, ब्रह्मन्)이라고 합니다. 커지다를 뜻하는 √bṛh(बृह्)에서 나왔지요. 그리고 이 브라흐만은 신격으로도 묘사되지만,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전능자로서의 신(神)이 아니라 궁극의 실재, 절대성, 완전성, 전체성 등 일원적 실체를 가리킵니다.
이샤 우빠니샤드(ईशोपनिषद्, īśopaniṣad)의 한 구절을 살펴볼까요.
저것이 완전하고 이것이 완전하다. 완전에서 완전이 나오나니.
완전에서 완전을 빼내어도 오직 완전이 남나니.
ओं पूर्णमदः पूर्णमिदं पूर्णात्पूर्णमुदच्यते ।
पूर्णस्य पूर्णमादाय पूर्णमेवावशिष्यते ॥
oṃ pūrṇamadaḥ pūrṇamidaṃ pūrṇātpūrṇamudacyate |
pūrṇasya pūrṇamādāya pūrṇamevāvaśiṣyate ||
이보다 더 완전한 완전에 대한 묘사는 없겠지요? 마치 수학에서 숫자 0을 발견했을 때의 경이로움을 시(詩)로 표현한 것 같지 않나요? 0+0=0, 0-0=0, 0×0=0, 0÷0=0. 이 0도 인도인들이 기원전 900년경에 발견한 거지요. 무한대(∞)에서 무한대(∞)를 더해도, 빼도 무한대(∞)인 것과 같습니다.
원문의 뿌르나(पूर्ण, pūrṇa)는 √pūr(채우다)에서 나와서 가득한, 풍부한, 모든, 완전한 등으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뿌르나 하면 뭔가 떠오르는 게 없나요? 뉴스에 매년 한번 이상은 꼭 등장하지요. 네팔의 유명한 산 이름입니다. 아, 생각이 났다고요? 맞습니다. 안나뿌르나는 우리에게 안나푸르나로 알려져 있지요. 원 발음은 뿌르나가 맞습니다. 그 산은 왜 안나뿌르나가 되었을까요? 그 이름에 답이 있습니다.
안나뿌르나는 음식이 풍부하다는 뜻입니다. 이 산 주변으로 물이 풍부해서 산 아래에는 곡창 지대가 형성되었고 이후 큰 도시로 성장했지요. 지금은 네팔 제2의 도시가 되었답니다. 어디냐고요? 포카라(뽀카라가 원 발음)입니다.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해주니 어찌 고맙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8,000m급 설산의 위용은 인간이 우러러보게 만들지요. 그래서 뽀카라 뒷산 안나뿌르나는 '풍요의 여신'이 되었답니다.
한편, 출렁이는 파도 같은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밑엔 대양의 심연 같은 고요한 마음의 기반이 발견됩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발견되는 이 무한한 마음의 원천이자 정수를 아뜨만(आत्मन् ; ātman)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숨 쉬다를 뜻하는 √an(अन्)과 돌아다니다를 뜻하는 √at(अ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호흡은 보이지 않는 공기가 몸 안팎을 드나들며 생명을 유지하게 만들기에 영혼이라는 의미가 부여됩니다. 라틴어 anima도 호흡과 영혼을 뜻하지요. 영어에서 숨을 마신다는 의미가 있는 inspiration도 영혼(spirit)이 안(in)으로 들어옴을 뜻합니다. 독일어에서는 호흡을 atmen이라고 하지요.
세계는 브라흐만으로 뒤덮여 있기에 우리 각자에게도 브라흐만이 깃들어있겠지요? 우리 각자에게 깃든 브라흐만을 아뜨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나의 정수이자 마음의 기반인 아뜨만과 우주 또는 세계의 기반인 브라흐만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다르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요.
말로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면 뭔가 좀 허전하겠지요? 따라서 말로 만이 아닌 체험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의 정수 아뜨만을 체험하고, 이것이 브라흐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제로 분리 감이 극복되니까요. 그 체험을 위한 노력이 바로 요가 수행입니다. 좀 더 적확(的確)하게 표현하자면 요가를 위한 수행이겠지요. 그 합일의 체험을 요가라고 부르니까요. 아마도 지금 시중에서 요가한다는 의미는 대체로 '일종의 운동을 한다'일 겁니다만.
가만히 멈추어 동요하는 마음을 다잡고 깊이 침잠함으로써 온갖 생각과 감정에 속박되지 않은 마음의 청정하고 경계가 없는 본성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요가수뜨라에서 요가를 마음작용의 억제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이 지점에서 분리 감을 넘어 말 그대로 요가(합일/결합)가 일어납니다. 인도의 성자 라마끄리슈나(1836 ~ 1886)는 언젠가 합일에 관해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소금인형이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지.
그 소금인형은 다른 사람들에게 바닷물이 얼마나 깊은 지 말해주고 싶었거든.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 들어가자마자 녹아버렸으니까!
시(詩) 소금인형의 모티브가 되어준 이야기랍니다. 소금인형을 읽고 시작한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바닷물로부터 나온 소금, 그 소금으로 만들어진 소금인형은 바닷물과 둘이 아니기에 다시 합쳐져서 하나가 됩니다. 브라흐만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철학이 바로 불이론(不二論, 아드와이따 웨단따, अद्वैत वेदान्त, advaita vedānta)입니다.
이야기만으로는 아쉬울 수 있으니까 비슷한 표현이 있는 경전의 한 구절도 소개해드릴게요. 15세기에 작성된 최고의 하타요가 경전인 《하타쁘라디삐까, haṭhapradīpikā, हठप्रदीपिका》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하타요가에 관한 담론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아주 중요하니까요).
소금이 물에 들어가 같아지듯이
그처럼 아뜨만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을 사마디라고 한다.
सलिलेसैन्धवंयद्वत्साम्यंभजतियोगतः
तथात्ममनसोरैक्यंसमाधिरभिधीयते
salile saindhavaṁ yadvatsāmyaṁ bhajati yogataḥ
tathātmamanasoraikyaṁ samādhirabhidhīyate
경문에서 사마디는 삼매의 원어입니다. 같은 책 다른 구절에는 결합된 상태, 즉 합일된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좀 전에 항아리 비유를 했는데, 그 출처가 드러나고 말았네요.
공간 속의 빈 항아리처럼 안도 텅 비고 밖도 텅 비어있다.
대양 속의 항아리처럼 안도 가득 차 있고 밖도 가득 차 있다.
अन्तःशून्योबहिःशून्यःशून्यःकुम्भइवाम्बरे
अन्तःपूर्णोबहिःपूर्णःपूर्णःकुम्भइवार्णवे
antaḥ śūnyo bahiḥ śūnyaḥ śūnyaḥ kumbha ivāmbare
antaḥ pūrṇo bahiḥ pūrṇaḥ pūrṇaḥ kumbha ivārṇave
항아리의 모양에 따라 그 안에 있는 물의 형상은 달라지지만, 물이라는 본질에 있어서 대양의 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다른 비유로, 물방울이 대양에 떨어져 대양과 하나가 되는 이치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인(因)과 연(緣)에 따라 만들어지는 형상은 제각각이어도 존재라는 관점에서는 둘이 아니지요. 금송아지, 금두꺼비, 금반지, 금목걸이, 금팔찌 등 모양은 달라도 다 같은 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