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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언 Nov 26. 2021

인문학적 요가 수업

요가는 왜 하나가 되려 하나?

그렇다면 요가는 왜 기를 쓰고 하나가 되려고 하는 걸까요? 당연히 그마만한 이득이 있기에 기를 쓰고 하나가 되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그 이익이 대체 무엇일까요? 소금인형이 바다와 하나가 된 것처럼, 마음의 눈으로 깊이 들여다 봄으로써 만유(萬有)의 동질성을 몸소 체험한다면 세상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겁니다. 이 인식 변화야말로 인생 최고의 이득이지요.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에서 자연스레 우호감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나는 너와 완전히 달라”라는 이질감은 배타성과 이기심을 키울 뿐입니다. 이로부터 민족 또는 인종 우월주의 그리고 종교적 극단주의 따위가 생겨납니다. 그 결과 갈등과 적대감 그리고 증오가 일어나고 심지어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보편적 우호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요가수뜨라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이 우호감을 수련하라고 말합니다. 이 우호감을 마이뜨리(मैत्री, maitrī)라고 합니다. √mith(만나다)에서 온 말입니다. 만나니까 친밀(मैत्री, maitrī)해지고, 친밀해지니까 친구(मित्र, mitra, 미뜨라)가 됩니다. 영어의 '만나다(meet)'가 생각나지요? 불교의 미륵불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미륵(彌勒)은 마이뜨레야(मैत्रेय, maitreya)의 음역이지요. '친밀한, 우호적인, 도움이 되는'이라는 뜻입니다. 내친김에 요가수뜨라의 경문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즐거움, 괴로움, 선, 악의 대상에 대해 

우호감, 연민, 기쁨, 냉정을 수양함으로써 

마음이 고요해진다.

मैत्रीकरुणामुदितोपेक्षाणां सुखदुःखपुण्यापुण्यविषयाणां भावनातश्चित्तप्रसादनम् 

maitrīkaruṇāmuditopekṣāṇāṃ

sukhaduḥkhapuṇyāpuṇyaviṣayāṇāṃ

bhāvanātaścittaprasādanam 


즐거워하는(सुख, sukha, 수카) 존재들을 보면 배 아파하지 말고 우호감을 내비치고, 괴로워하는(दुःख, duḥkha, 두후카) 존재들을 보면 고소하다고 하지 말고 연민(करुणा, karuṇā, 까루나)의 마음을 갖고, 선행을 보면 가식이라 손가락 질 말고 진심으로 기뻐하고(मुदित, mudita, 무디따), 악행에 대해서는 분노와 비난보다 냉정(उपेक्षा, upekṣā, 우빼끄샤)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냉정(冷靜)은 '냉정(冷情)하게 뿌리치고 갔다'고 할 때 냉정이 아니라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침착함'을 의미합니다. 우빼끄샤는 무관심이나 무시로도 번역됩니다. √īkṣ(보다)에 접두어 upa(가까이, ~향해서)를 붙여서 '가까이 봄'이 됩니다. 한자어 무시(無視)는 보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원어는 그 반대지요. 애써 고개를 돌리기보다 가만히 들여다본다는 겁니다. 따라서 마음을 계발하고 수련한다는 의미에서 무관심이나 무시보다 냉정(冷靜)이 더 적합한 번역이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감정에 휩쓸려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바라본다면 대응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자체로 효과적인 대응이 될 수도 있고요. 인도 독립운동 당시 간디가 벌였던 비폭력 무저항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제국이라는 거악에 분노와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비폭력을 내세워 냉정을 실천한 거지요. 이 네 가지 마음 수련을 불교에서도 자비희사(慈悲喜捨)로 번역해서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우호감은 동질성의 확인으로부터 나옵니다. 좀 피상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 통성명을 하고 고향을 묻고 나이를 묻고 직업을 묻고 취향을 묻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이 중 뭐라도 하나 같은 게 걸리면 우호감 수치가 확 올라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건 양날의 검이지요. 뭔가 하나도 맞지 않거나 심지어 상극이면 우호감은 떨어지고 비호감은 높아집니다. 


예컨대 지역 정서가 강한 사람은 타지 사람이란 이유만으로도 적대적 태도를 취하며 관계에서의 괴로움을 양산합니다. 한데, 적대적 태도 자체가 괴로움이란 걸 간과하면 안 됩니다. 그 태도 자체가 먼저 자신을 괴롭히게 되어있습니다. 또한, 그 원인이 그 사람의 고향이 아니라 자신의 지역 정서에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쓸데없이 자신을 괴롭힐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내 마음이 괴로우면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도 괴롭히게 됩니다. 


이런 방식의 고통 구조가 인간의 심리에 만연해 있습니다. 나와 내가 아닌 것, 내가 속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 강하게 줄을 긋고 경계를 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심리적 운신의 폭은 줄어듭니다. 마음이 해탈과는 멀어지고 속박과는 가까워집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요소는 늘어나고 즐거움과 즐거움의 요소는 줄어듭니다. 


또한, 몸의 경계선 안으로 나의 개념을 한정하면 고립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고립감은 외로움이라는 마음의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이 고립감 속에서 외로움을 덜어줄 관계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깨지기 쉬운 약한 연대감에서 잠시 외로움을 잊습니다. 이 연대감 속에서 나의 경계는 얼마간 확장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마음의 계발이나 심리 구조의 변형에 따른 변화가 아니기에 고립감과 불안은 여전합니다.


하여 이마저도 실패하면 외로운 늑대가 되기도 하고, 우울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위적이고 가변적인 관계에서 답을 찾기보다 자기 안에서 답을 찾는 시도가 더 필요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분리감과 고립감이 정말로 온당한가? 이것은 본질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인생의 조건인가?”라고 한 번쯤은 자신에게 묻고 깊이 사유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분리감과 고립감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해소하기 위해 명상해야 합니다. 


깊이 호흡하고, 생각이나 감정 등 마음의 여러 작용들을 뒤로하고, 마음 그 자체에 조율해 들어간다면, 모든 까르마의 결정체인 몸에 속박되어 구조화한 마음의 프레임을 넘어, 마음의 경계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경계 없는 마음이 브라흐만이고, 요가가 그렇게 합일하고자 하는 그것입니다. 요가가 체득되면 분리감과 고립감에서 비롯된 괴로움은 사리지고, 피상적이지 않은 참된 동질감에서 비롯된 우호감이 자신의 존재 깊이 자리 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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