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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언 Dec 29. 2021

인문학적 요가 수업

뿌루샤와 쁘라끄리띠

요가 철학에는 뿌루샤(पुरुष, puruṣa)라고 부르는 순수 의식과 쁘라끄리띠(प्रकृति, prakṛti)라고 부르는 근본 물질이 있습니다. 근원적인 실재가 둘 있다고 해서 이원론(द्वैत, dvaita, 드와이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순수 의식이자 진아(眞我)인 뿌루샤는 현상 세계의 영원한 질료인 쁘라끄리띠로부터 전개(परिणाम, pariṇāma)된 세계를 경험하면서 세계에 연루되는데, 이것을 속박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VR(가상현실) 체험인데도 실제 같은 착각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영화 보다가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되는 것처럼, 쁘라끄리띠에 속박된 뿌루샤가 쁘라끄리띠의 속성인 변화에 이입됩니다. 그러면 뿌루샤는 자신의 순수성을 잃고 경험하는 대상에 물들게 됩니다. 투명한 수정 구슬이 주변 환경에 물드는 것과 같지요. 빨간 종이 위에 있으면 빨간 구슬이 되고, 파란 종이 위에 올려놓으면 파란 구슬이 되는 이치입니다. 


하지만 빨간 종이 위에 있는 구슬이 “나는 빨간 구슬이다”라고 한다면, 이 구슬은 자신의 정체성을 착각하는 거겠지요? 빨강은 자신의 본색(svarūpa)이 아님을 아는 것이 바로 요가입니다. 그래서 경험의 주체이자 관조자(draṣṭuḥ)인 뿌루샤가 경험하는 대상과 탈동일시되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해탈, 즉 속박에서 풀림이라고 합니다. 요가수뜨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관조자는 자성에 머무나니.

तदाद्रष्टुःस्वरूपेऽवस्थानम्

tadā draṣṭuḥ svarūpe'vasthānam

따다 드라슈뚜후 스와루뻬'와스타남


그때(तदा, tadā)란 마음 작용이 억제되었을 때를 말합니다. 요가는 마음 작용 억제이고, 마음 작용이 억제되면 관조자인 뿌루샤가 자신의 본래 모습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관조자 드라슈뚜후(draṣṭuḥ)는 √dṛś(보다)에서 온 명사입니다. 쉽게 말하면, 드라슈뚜후는 보는 자이고 본다는 건 모든 감각적 경험을 대표한 표현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아는 이 모든 걸 우리 감각의 대표 격인 시각으로 수렴한 거지요. 따라서 보는 자는 경험의 주체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경험의 주체를 바로 '나'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관조자(draṣṭuḥ)와 본질로서의 나(puruṣa)는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뿌루샤는 사람을 뜻하지만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영어의 man에 해당합니다. 지금은 man이 양성 평등 기조에 따라 사람을 뜻하기보다 남자에 한정되지만, 이전에는 남자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지요. 지금도 사전적 의미는 여전히 사람이자 남자입니다. 같은 예로,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중 환희의 송가에 alle menschen이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모든 남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독일어 mensch는 man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프랑스어 homme도 마찬가지고요. 남성 시대의 산물이 세계의 많은 언어에 남아 있음을 새삼 느끼면서 다시 뿌루샤로 돌아가겠습니다.


뿌루샤는 일반적으론 사람을 뜻하는 말이지만, 요가 철학에서는 '사람의 본질'이라는 뜻으로 규정됩니다. 사람의 본질이 대체 뭘까요? 사람은 왜 태어나 수많은 고뇌 속에서 약간의 행복을 맛보며 살다가 마침내 병들어 죽는 걸까요? 이것이 동서고금 모든 철학을 관통하는 기저 질문 아니겠습니까? 지적 유희로써 철학적 명언을 외우는 것보다 자신의 본질을 통찰하기 위해 근원적 질문을 던져보고 깊이 사유해보고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보는 게 진정한 철학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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