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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Dec 24. 2019

친구란 말이 터무니없게 느껴질 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첫사랑과 헤어지면서 제일 먼저 한 다짐은 이제부터 운명을 믿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런 다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운명인 것 같은 일들은 내 앞에 자꾸 나타났다. 지독한 운명론자인 나에게 운명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운명의 범위에는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떡볶이라거나, 먹을 거 많은 뷔페에서 굳이 어묵을 집는다거나 하는 이상한 순간들도 포함되었다. 그때의 나는 아마 운명을 핑계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지점에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이제부턴 운명 같은 건 없다고 다짐해놓고 불현듯 운명을 예감하게 되는 그 지점들, 예를 들면 오래전에 좋아했던 애를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다던가, 나만큼이나 카레를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머릿속으론 절대로 하지 말자고 다짐한 일이 마음속으론 성큼성큼 다가올 때. 나는 그럴 때마다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사랑은 항상 다짐보다 먼저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막 입사한 스물다섯의 나는 사회생활이란 것 자체에 잔뜩 겁먹은 상태였다. (모든 여대생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여대를 다녔고, 그 덕분에 하고 싶은 활동만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4년 동안 개강총회라는 건 가본 적도 없고, 과에 아는 친구도 거의 없으며, 술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20대 중반까지 내 주량도 몰랐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니 대학생 때 요리조리 피해 온 많은 일들이 무척 필요한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술도 잘 마셔야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지내야 할 것만 같았다.

첫 사회생활은 실수 투성이었다. 매일매일이 평가의 연속이었고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은 쪽이었다. 하루는 낯을 가린다고 했다가 회사에서 그런 게 어딨냐고 핀잔을 들었다. 또 하루는 가만 보면 참 순진한 것 같다고 위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하다 보면 집에 못 간다는 말도 들었다. 듣고 보면 다 맞는 말이어서 퍽 혼란스러웠다. 적당히 요령껏 하는 사회생활이란 뭘까.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야 할까. 정답이 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내 생각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뭘 해도 어려운 회사에서 친구라는 말이 터무니없게 느껴질 때, 친구가 생겼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일로 열을 내던 사람들, 그리고 비슷한 방식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 (보통은 먹으면서 풀었다.) 동료에서 친구가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각자 달랐지만 우리는 결국 친구가 됐다.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은 회사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위로가 되었다. 회사에선 도무지 친구를 사귈 수 없다고 단념할 때, 선뜻 곁을 내어줄 사람이 생긴다는 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과 비슷한 일이다.




나를 빼고는 모두 88년생인 언니들(이하 88이들)은 내가 언니라고 부르면 어색해서 화들짝 놀라는 점이 진정한 친구 같다. 그럼에도 영등포를 벗어나지 못하는 점은 영락없는 회사 친구다. 해괴하게도 영등포에서 일하는 우리는 영등포로 호캉스를 떠났다. 때아닌 출근으로 무려 세 시간이나 늦은 나를 위한 서프라이즈 풍선 파티는 진정한 친구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며 사무실에서 테이프랑 커터칼을 챙기면서 느낀 알 수 없는 뿌듯함은 회사 친구들끼리만 알 수 있는 기쁨이었다.

기왕 호텔 가는 거 근사하게 한 끼 먹자고 해놓고 컵라면 몇 개 끓여서 마감세일하는 초밥을 허겁지겁 먹어댄 건 서로에게 숨김없는 찐 친구라는 뜻이다. 피곤해서 많이 못 마실 것 같았는데 술이 모자라게 된 건 아마 서로가 좋아서일 거다. 누군가 술을 사러 간 동안 계란을 삶는 마음은 절대 타인의 수고에 무임승차하지 않겠다는 앞뒤 꽉 막힌 아가페적 사랑이다. 주말에 일한 친구가 미안해할까 봐, 대표로 결제한 친구가 부담될까 봐, 가운데 앉은 친구가 와인잔 둘 데 없을까 봐, 아쉽게 오지 못한 친구가 서운할까 봐 걱정하던 밤은 금방 사라졌다.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일은 어제만큼 열렬한 친구로 지내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시간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안달 나진 않을 것이다. 언제 만나든, 얼마 만에 만나든 좋은 소식엔 함께 웃을 것이고 나쁜 일엔 같이 달려들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인생에서 이런 순간을 사랑한다. 딱히 기대하지 않은 기쁜 일이 생길 때, 다 큰 뒤에 진정한 친구를 만난다는 게 남 일 같은데 내 일이 될 때. 인생에 대한 지루한 예상을 벗어나는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때. 실컷 놀고 호텔에서 돌아와 낮잠을 두 번 자고 일어나니 어쩌면 이런 시간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순간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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