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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Mar 21. 2020

일찍 일어나는 새가 마스크를 살까

윤뿅뿅 약사님 힘내세요

코로나 시대가 도래한 후,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바로 약국 이름과 위치를 정확하게 외우는 능력이다. 평소에는 약국이라고만 기억하던 것이 이제는 어드메의 대명약국, 소망약국, 수정약국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마스크 때문이다. 마스크를 써야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고 바이러스를 막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2020년의 목표는 그 무엇도 아닌 생존이다. 생존을 위해 하나에 1,500원하는 합리적인 가격의 마스크를 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노력해도 꼭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인생은 내 뜻대로 안 된다더니 정말 그렇다.


며칠 전 월요일, 86년생 동기 언니에게 출근길에 회사 앞 약국에서 번호표를 받았다는 고급 정보를 입수했다. 생년 끝자리가 6인 언니가 곁에 있으며 친하기까지 하다는 것은 축복이자 기쁨이다. 언니가 조심스레 보여준 번호표에는 번호표라는 말이 무색하게 포스트잇에 [대명약국 윤뿅뿅]이라는 도장이 찍혀있었다. 번호는 없고 약국 이름과 약사님 이름만 있었다.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일부 기업들이 재택근무를 한다기에 매일 밤 재택근무를 기도하며 잠들었지만 역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생은 내 뜻대로 안 된다더니 정말 그랬다.


대신 나는 이룰 수 있는 것을 소망하려고 노력했다. 가능성이 없는 일을 바라면서 스트레스 받지 말자. 재택근무가 가망 없다면 마스크를 사자. 주 5일 근무 기준, 1인당 한 달에 20개의 마스크가 필요하기 때문에 여유분이 조금 있다고 해도 마음이 불안했다. 게다가 우리 집에는 당뇨와 고혈압 등 기저질환자가 두 명이나 있고, 그중 한 명은 출근까지 하고 있다! 아무래도 마스크를 사는 것은 여러모로 효도하는 길이요, 불안을 다스리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들의 생각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86년생 언니의 마스크 구매 소식은 우리 팀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결국 우리는 86 언니의 첫 공적 마스크 구매를 축하하기 위해 넷이 함께 약국으로 달려갔다. 넷 중 *6년생이 단 한 명이라는 사실에 등장부터 단발머리 약사님은 조금 질린 눈치였다. 들뜬 마음을 자제하고 용기 내서 아침 몇 시쯤 와야 성공할 수 있냐고 물었지만 단발머리 약사님은 그다지 반응이 없었다. 심드렁하게 8시 전에 매진된다는 말만 하고는 그마저도 정확하진 않다고 했다. 조금 상처 받았지만 같은 질문을 받는 것과, 장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생각했다. 내 질문은 마치 매진된 표를 언제 구할 수 있느냐와 같은 질문이었다. 약국을 나오며 86 언니는 아침에 번호표를 주던 약사님과 다른 약사님 같다고 했다. 우리는 그럼 윤뿅뿅 약사님은 퇴근했나 보다며 꼭 내 차례 때 그분께 번호표를 받고 싶다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시차출퇴근제로 8시에 출근하고 있는 옆자리 89 언니와 나는 7시 30분까지 출근해서 마스크를 살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목요일. 이제까지의 목요일은 모두 가짜라고 느껴질 만큼 중압감이 느껴지는 목요일이었다. 진짜배기 목요일의 개막. 일찍 일어나는 새가 마스크를 산다. 물론 90년생인 나에게는 해당 없는 목요일이었지만, 평소 늘 같이 출근하는 탓에 같은 집에 사냐는 얘기(tmi:다른 집에 산다)까지 듣는 우리는 약국에도 꼭 함께 가야만 했다. 자기 전에는 재택근무 시켜달라는 터무니없는 기도 말고 윤뿅뿅 약사님께 번호표를 받게 해 달라는 실현 가능한 소원을 빌었다.


용산 급행이 지연되는 바람에 약 4분가량 늦었는데 약국 문 앞에는 ‘금일 공적 마스크 판매 완료’라는 청천벽력 같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이 세상에 일찍 일어나는 새들이 이렇게 많다니. 윤뿅뿅 약사님으로 추정되는 남자 약사님이 계셨다. 다행히도 그 종이는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이었으면 하는 일들이 많은 코로나 시대이기에, 참으로 반가운 거짓말이었다. 89 언니는 보라색 포스트잇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성취감에 우리는 약국 문을 나서자마자 윤뿅뿅을 연호하며 자축했다. 그렇게 나의 금요일도 순탄히 지나갈 것만 같았다.


진짜배기 금요일을 앞두고, 89 언니만 성공하고 나만 실패하는 악몽 같은 걸 꾸진 않을까 걱정하며 침대에 누웠다. 한 주 내내 남의 마스크에 너무 열광한 나머지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와 나답지 않게 10시에 잠이 들고 말았다. 불현듯 눈을 뜨자 5시 55분이었고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 아침부터 자존감이 차올랐다. 웬일인지 용산 급행마저 정시 운행이라  어제보다 더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깔깔 웃으며 약국 문을 열었다. 그러나 웃음도 잠시, 윤뿅뿅 약사님의 표정은 아주 불길했다. 아니나 다를까 애석하게도 오늘은 다 끝났다는 말에 우리는 깜짝 놀라 헉 소리를 내며 서로를 쳐다보며 망연자실했다.


마스크 때문에 10시에 잤다고 매달려볼까, 어제보다 4분 일찍 도착했는데 왜 안 되냐고 진상을 떨어볼까 고민했지만 그냥 운이 안 좋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차마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슬슬 다른 약국을 떠올리던 차에, 윤뿅뿅 약사님이 갑자기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젊으신 분이고 업무도 보셔야 하지 않냐며, 슬쩍 노란색 포스트잇을 건넸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면서 맞다고, 젊고 업무도 봐야 한다며 단 한 번의 인사치레도 없이 포스트잇을 낚아챘다. 우리는 약국을 나서며 윤뿅뿅 약사의 팬클럽을 창단했다. 그의 융통성은 대단해서 하루 종일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했다. 알고 보니 그는 리액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마스크가 간절한 사람에게만 포스트잇을 주는 게 아니냐는 해괴한 상상까지도 하게 만들었다.  


내게 강같은 약사 내게 강같은 약사


약국 포스트잇을 민증에 부적처럼 고이 붙인 채로 퇴근하자마자 약국으로 달려갔다. 윤뿅뿅 약사님은 퇴근하고 단발머리 약사님만 계셨다. 포스트잇을 붙인 민증과 결제할 신용카드를 내밀자, 단발머리 약사님은 말없이 내 주민번호를 조회한 후 마스크를 건넸다. 며칠 전처럼 여전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그녀의 약사 가운에는 이상한 글씨가 있었다. 약사 윤뿅뿅. 그제야 나와 89 언니는 팬클럽을 잘못 창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팬클럽 이름의 영향으로 우리는 진짜배기 윤뿅뿅 약사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대부분이 그녀가 고단한 이유 100가지와 오전타임 익명의 번호표 약사님과는 어떤 관계인가 하는 쓸데없는 상상이었다.


윤뿅뿅 약사님이 기운을 내고, 내가 마스크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날은 언제쯤 다시 돌아올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될수록 사회가 불안과 분노로 가득 해지는 것 같아 두렵다. 인생에는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많지만, 실현 가능한 것만 소망하는 것이 속 편한 것을 알지만, 운 좋게 마스크를 산 것처럼 언젠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종식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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