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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Jun 28. 2020

코로나와 와플이 알려준 것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들


코로나 시대가 도래한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코로나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제일 먼저 나는 불금에도 막걸리의 유혹을 뿌리치고 곧장 집으로 귀가하는 모범 직장인이 되었다. 출근길의 유일한 낙인 스타벅스 컵커피는 마스크 때문에 못 먹은 지 오래다. 치앙마이 여행 갈 때 입으려고 사둔 치앙마이 원피스는 그냥 양천구 원피스가 됐다. 친구네 아기를 보러 가려던 계획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말은 정말 맞았다.


'저녁 약속은 잡지 않는다'는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삶은 개인의 위생 측면에서는 완벽했지만 개인의 기분 측면에서는 좀 지루했다. 집 아니면 회사에서만 지내는 삶은 너무 단조로웠다. 돈 받고 일하는 회사에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결국 집에서의 생활을 정비해야 했다. 남들은 집에서 운동도 하고 청소도 곧잘 하는데 나는 집에서 주로 눕거나 먹기만 한다. 잠은 늘 넘치도록 자고 있기 때문에 일단 더 잘 먹기 위해서 와플기를 샀다. 집에서 지금보다 더 알차게 먹으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탓인지 배송이 3주나 걸린다고 했다. 그랬다. 와플기는 가전계의 닌텐도였다.


청천벽력같은 배송지연 소식. 4월에 샀는데 5월에 오는 기적..


그러나 와플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지치지 않고 열심히 재료를 샀다. 요새 유행하는 크로플(크로와상+와플)을 굽기 위한 크로와상 생지, 슈가 파우더, 시나몬 파우더, 비싼 메이플 시럽을 대신할 아가베 시럽 등등. 그러나 3주라는 시간은 이것만 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어서 기다리는 동안 또 다른 재료를 더 샀다. 자고로 와플기를 샀으면 카페에서 파는 것 같은 동그란 와플은 한 번 만들어 봐야 하는 법. 운동은 그렇게 쉽게 포기하더니 먹을 것 앞에서는 끝장을 보겠다는 나 자신이 참 피곤하다. 핫케익 믹스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Q사의 와플 믹스와 버터, 우유를 추가로 구매했다.


와플기를 기다리며 사모은 것들...


이쯤 되니 와플 굽기가 주업이고 회사일이 부업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와플 재료를 사려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서 회사에서는 소처럼 일을 했다. 다행히 와플기는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고, 몇 번의 연습을 거쳐 크로플도 원형 와플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구울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내가 원하는 맛이 아니라는 거였다. 크로플과 Q사 믹스의 치명적인 단점은 느끼함이었다. 아침에 공복으로 피자도 씹어 먹는 나지만 왠지 모를 의문이 생겼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한 결과, 내가 원하는 와플은 중학생 때 학원 앞에서 사 먹었던 길거리 와플이라는 걸 깨달았다. 싸구려 사과잼에 생크림 듬뿍 바르고 계피 가루로 마무리한 그 맛!!


맛있지만 느끼했던 나날들... 내가 원하는 것을 몰라 헤맸던 나날들...

이럴 수가. 먹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나 자신에 대해서 꿰고 있는 이 시대의 타고난 먹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 내 와플 취향도 모르는 와플 애송이였던 것이다. 와플 애송이의 두 번째 문제는 먹을 줄만 알고 만들 줄은 모른다는 거였다. 살면서 길거리 와플 만드는 법을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나는 와플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왜 고등교육과정에서 알려주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며 정보의 바다를 하염없이 누볐다. 와플 믹스에 대한 글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은 결과, 아메리칸 와플 믹스라는 것을 사면 길거리 와플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입수하고 세 번째로 와플 재료를 샀다. 이제 보니 와플은 부업으로만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재료비가 많이 들어서야. 본업이 있는 게 참 다행이었다.


*와플 판매업자에 따르면 와플은 (바삭한) 아메리칸 와플과 (꾸덕한) 벨기안 와플로 나뉜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와플에 대한 열정으로 주경야독.. 공부 또 공부. 공부만이 살 길이다.

도착한 아메리칸 와플 믹스는 촌스러운 빨간색 포장이었는데 촌스러워서인지 더 믿음이 갔다. 느끼함이 없고 바삭함이 강점이라는 아메리칸 와플을 만드는 법은 간단했다. 아메리칸 와플 믹스 200g에 우유와 버터가 아닌 물을 200g 넣고 묽게 반죽해주면 된다고 했다. 느끼한 와플을 만드는 법과는 너무 다른 미니멀리즘에 놀랐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물과 가루만으로 만든 와플은 바삭하고 고소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았다. 드디어 내가 중학교 때 먹던 바로 그 맛을 재현해낸 것이다. 지나가던 아빠가 슬쩍 집어먹더니 아니 와플은 이게 진짜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갑작스러운 길거리 와플 성공에 취한 나머지 나는 겁도 없이 아이스크림 와플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촌스러운 빨간색과 성공적인 길거리 와플~*

아이스크림 와플을 위해서는 일단 아이스크림 스쿱이 필요했다. 혹시 실패할까봐 스쿱과 디퍼 두 종류 다 샀다. (-12,000) 그리고 아이스크림도 2가지 이상 필요했고, (-15,000) 아이스크림이 없는 자리를 채울 과일도 있어야 했다. (-20,000) 또다시 회사에서 번 돈을 와플에 투자했다. 와플에 올릴 과일로는 딸기가 제격인데 애석하게도 딸기는 이미 철이 지나서 구할 수 없었다. 꿩 대신 닭으로 블루베리를 샀다. 손바닥 크기의 팩이 4,000원이나 했다. 순간 12,000원 정도 주고 그냥 아이스크림 와플을 사 먹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듯, 이제는 와플을 만들기 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와플 3개 이상은 굽는다며 정신승리를 하며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멀고 먼 아이스크림 와플의 길. 1단계 스쿱 구매.


아이스크림 와플의 비극은 와플은 뜨겁고 아이스크림은 차갑다는 데 있었다. 와플은 너무 식히면 맛이 없고 아이스크림은 시간이 지나면 녹는다. 그 와중에 생크림도 예쁘게 짜야하는데 짤 주머니가 없어서 결국 1차 시도는 실패. 집에서 와플을 구우면서 자연스럽게 엄마 아빠와 얘기하는 시간이 늘었는데 실패한 와플도 엄마 아빠는 맛있다고 잘 먹었다. 특히 감동인 점은 먼저 구워달라고 요청한다는 점이었다. 엄마 아빠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나는 와플의 성공을 위해 자나 깨나 와플 생각만 했다. 회사에서도 와플 얘기, 미용실에서도 와플 얘기만 했다. 인스타에서 #아이스크림와플로 검색해서 예쁜 사진들을 예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게 미리 스쿱으로 떠서 냉동실에 넣어놓고, 과일도 미리 썰어두었다. 생크림은 미리 휘핑해서 냉장실에 넣어두고 와플은 미리 구워 식힘망에 올려두었다.


실패한 아이스크림 와플. 실패원인: 아이스크림 미간이 넓음,            생크림이 못생김, 과일 없음, 시나몬 파우더 색깔 구림 등등

와플이 식으면 녹지 않는 과일부터 먼저 올려서 장식한 후 슈가파우더를 과하게 뿌려줬다. 특히 카페 비주얼을 내려면 블루베리에 슈가파우더를 많이 뿌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블루베리 위에 집중적으로 뿌렸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꺼내서 동그랗게 얹고 이번에는 시나몬 파우더를 뿌려준다. 마지막으로 생크림은 중앙으로 쌓듯이 올려주면 된다. 짤 주머니가 없기 때문에 잘 쌓아주면서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완성된 와플은 너무 완벽해서 아메리칸 와플도 모르던 와플 애송이가 만든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수많은 카드결제 문자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앞으로 5번은 더 해 먹을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모른 척하기로 했다.


성공한 아이스크림 와플. 성공 비결 : 블루베리 위에 슈가파우더 뿌림.


와플을 만들면서 엄마 아빠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늘었다. 엄마는 예전에는 술만 먹으러 다니더니 코로나 때문에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서 같이 부엌에 있는 게 그저 좋다고 했다. 엄마는 나를 과잉보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31살인 나를 못 믿어서 와플 반죽을 직접 만들어주기도 했다. 와플에 올라갈 과일도 말만 하면 다 썰어주고 씻어준다고 했다. 아빠는 이게 참 희한하게 맛있다면서 매일 저녁 오늘은 와플 안 굽냐고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실제로 아빠는 소문난 미식가라서 맛없는 것은 절대 입에 대지 않기 때문에 아빠의 기미와 평가는 와플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렇게 그날 밤도 우리 셋은 와플을 먹으면서 맨날 했던 조카 얘기를 또 했다.


매번 밤늦게 들어와 자고 또 놀러 나가기 바빴던 집이었는데 코로나 덕분에 그동안 중요한 것을 잊고 지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리워하던 코로나 이전의 삶,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는 엄마 아빠와의 순간은 없었다는 것. 엄마 아빠와 간식을 먹는 이 소소한 시간들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순간이 될 것이라는 것. 코로나 덕분에 대기오염도 줄고 지구도 깨끗해졌다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코로나가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에게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존재인 건 아닐까! 엄마 아빠의 성화에 와플을 한 장 더 구우면서 소중한 이 시간들을 후회 없이 보내기 위해서는 과거를 그리워하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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