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탄력성
쓸모없는 일을 하자.
퇴사 후 가진 내 안식년의 원칙 중 하나였다. 돌아보면 이런 원칙을 세우게 된 데에 두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2017년,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번아웃 증후군을 치열하게 겪었다. 증상은 극도의 무기력함, 허무함, 둔해진 생각, 무뎌진 감정, 냉소적인 태도, 화, 불안감, 초조함 등이었다. 단순히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와는 결이 많이 달랐다. 인터넷이 없는 곳으로 2주 휴가를 다녀와도, 노래방에 가서 몇 시간 동안 소리를 질러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육체적, 정신적, 지적 총체적 고갈로,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번아웃이구나' 싶었다. 불과 1년 전, 회사에서 번아웃 방지를 위한 워라벨 강의를 들을 때만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번아웃이 뭔지, 어떤 증상을 동반하는지, 어떻게 싸워서 물리칠 수 있을지 고민을 시작했다.
"번아웃이라는 악마를 무찌르는 방법은 '막사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읽은 인터넷 상의 대부분의 글들은 '일과 삶을 분리해라', '적당히 일해라', '너무 애쓰지 마라', '휴식기를 가져라'라고 조언을 했다. 그런데 나는 쉽게 공감하기 힘들었다. 내 주변에는 일과 삶을 분리하지 않고, 온 열정을 불태워 일을 하면서도 번아웃을 겪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 또한 앞으로 일을 적당히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회사를 떠나 휴식기를 가지는 것은 단기적인 해결책은 되겠지만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휴식을 마치고 돌아오면 몇 년 후 똑같은 문제가 생길 테고, 정기적으로 안식년을 갖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일에 대한 마음가짐을 타협하거나 긴 휴식을 떠나는 등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도 좋아하는 일을 지치지 않고 오래 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내가 스스로에게 나름대로 내린 처방은 회복 탄력성(Resilience) 기르기였다.
회복 탄력성(Resilience): 용수철과 같이 사물이 원래의 모양대로 돌아가는 힘. 우리의 마음으로 치면 큰 시련이나 어려움을 겪고 삶이 흐트러져도 원래의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는 힘. 마음의 자기 치유력.
그럼 회복 탄력성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몸에 근육을 키우듯이 마음에도 감성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시인이 한 말이다. 난 중학교 졸업 후 운동으로 10kg을 감량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갖은 애를 썼던 경험이 있다. 그때 몸에 근육이 있으면 몸무게가 급격히 줄거나 늘지 않는다는 걸 체험했다. 그래서 마음에도 외부와 내부의 자극들을 요동치지 않고 견디게 해 줄 근육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머리에 쏙 박혔다.
그래서 쉬는 동안 내 몸(육체)과 마음(감성)의 근육을 키우고 단련시키는 활동들을 매일 1-2가지씩 꾸준히 해보기로 했고,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활동 중 하나가 바로 내게 목적 없는 즐거움을 주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사내 독서 모임에서 <숨결이 바람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를 읽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1년이라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에 대해 얘기해보기로 했다. 늘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나였기에 그중에서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추려내기란 식은 죽 먹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펜을 들고 평소 하고 싶었던 일들을 써 내려가다 보니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종이 위에 적은 목록은 대부분 생산적인 활동들, 다시 말해 목적이 있는 활동(불어 공부, 데이터 공부, 대학원 입학)이었는데, 이런 쓸모 있는 활동들은 살 날이 1년 남은 (가상의) 상황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반면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즐기고 싶은 활동들, 내게 목적 없는 즐거움을 주는 활동들은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목록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아, 내게 살날이 1년 남았다면 난 그 시간을 쓸모없고 즐거운 일을 하나라도 더 하며 쓰고 싶구나. 그렇다면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순간을 기다리지 말고 지금부터 하나씩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쓸모없는 일 하기 안식년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나의 쓸모없는 일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글에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