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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Jul 18. 2023

우회로에서 소용돌이를 만난 사람

#16. 자글자글

두 번의 장례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재충전도 할 겸 잠깐 쉬어야지 했던 시간은 3개월이 반년이 되고 반년이 다시 일 년이 되었다. 회사의 바쁜 일정과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은 인생의 마취제처럼 삶을 차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쫓기듯이 앞으로 가다 뒤돌아보니 덧없는 시간은 꽤나 흘러 있었다. 일 년이 지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유독 자주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20대 후반에 서점 문구대에서 아르바이트할 때였다. 하루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돋보기를 사러 왔었다. 물건을 만지작거리면서 이것저것 살펴보더니 대뜸 나에게 돋보기를 쓰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며 희미하게 웃는 거다. 솔직히 그때는 과장이 심한 아저씨라고 생각했다. 나이 든 게 많이 서운한가 싶었다. 내 청춘은 영원할 줄 알았고 먼 미래를 상상하기엔 눈앞의 문제가 너무 크게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서른일곱을 마주한 지금은 아저씨의 그 한마디가 꽤 실감 난다. 하루, 일주일, 한 달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특히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하루는 길지만 한 달이 엄청나게 짧다. 월급날만 기다리며  몇 달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한 해의 반이 지나있다. 한번 사는 삶 후회하고 싶지는 않은데, 일상은 매번 작고 허무하게만 느껴진다. 보장 없는 정년도 무섭지만 정년까지 앞만 보고 살다가 불현듯 돌아보는 인생도 만만치 않게 무서울 거 같다.


예전에는 내 상황이 바뀌지 않는 게 회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길에서 여러 번 벗어난 후 알게 된 건 회사가 주는 마취제 없이 스스로 삶을 꾸리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거다. 직장인은 입버릇처럼 돈만 있으면 다른 삶을 살 거라고 말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회사를 다니지만, 막상 로또가 당첨돼 완전한 자유가 생겨도 회사일보다 더 열정을 쏟을만한 '진정 원하던 일'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유가 되면 하고 싶은 일은 많다. 세계여행도 하고 영화도 만들고, 동화책도 내면 좋겠다. 큰 집에 극장을 만들어서 하루 종일 영화만 봐도 죽는 날까지 심심하진 않겠지. 매일 놀고먹기만 하면 좋긴 하겠지만,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면 하루의 가치는 달라진다. 일상은 이벤트로 채워지지 않는다.


직장생활은 돈이 많아도 한다. 사회생활용 직함이 필요해서, 은퇴 후 삶이 무료해서, 육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사회에 능력을 발휘하거나 단체 생활이 즐거워서 등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사실 회사생활의 순기능은 따로 있다. 회사는 길고 허무한 인생에 멘붕이 오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훌륭한 마취제다. 지루한 일상에 주말의 소중함도 알게 해 주고, 어느 정도 인간관계도 만들어 준다. 매일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보냈다는 만족감과 다음에 해야 할 숙제를 한꺼번에 주기 때문에 허무한 삶에 눈 돌릴 새가 없다. 가끔은 회사에 청춘을 바친 게 억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덕분에 죽지 않고 등 떠밀려 살아왔는지 모른다. 일상에 머리 박고 살아가는 삶은 버겁고 치열하지만, 한 발짝만 떨어져 바라보면 너무 짧고 큰 의미도 없어 보인다. 백수 생활을 하다 보면 나에게 주어진 24시간이 갈수록 부담스럽다.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에 있었던 8시간보다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낸 거 같지 않고, 그런 날이 쌓여 일주일이 되면 괜한 죄책감마저 느껴진다. 여행이나 취미생활이 한두 번은 해결책이겠지만 그거론 부족하다.


재작년 오랜만에 레일에서 벗어나 차분히 돌아본 나의 상황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다 멈춰 선 자리는 나침판 없는 망망대해였다. 또 한 번 풍경이 바뀌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건 내가 사회에서 꽤 나이 많은 사람이 됐다는 거였다. 나이가 많다는 건 증명이 필요하다는 뜻이고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멈춰 선 자리에서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만 깨달았다. 마취제가 풀린 삶은 근심이 가득했다. 밤마다 세상 모든 걱정을 나라는 깔때기에 욱여넣고, 원액을 뽑아 마시는 바람에 심장이 벌렁거려 잠들지 못하는 나날이었다. 뭘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멘탈이 약해지자 몸에도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불면, 두드러기, 어지럼증이 단골처럼 찾아왔고 건강 염려증도 심해졌다. 유독 기분이 안 좋은 날, 아침부터 어지럼증이 사라지질 않으면 혹시 큰 병은 아닌가 싶은 거다. 이런 상황이 한 달 정도 이어지자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밥이 잘 안 넘어갔다. 분명히 하루 종일 먹은 게 없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건강을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먹어야 하는데 뭘 먹어도 그렇게 맛이 없어서 밥 먹는 게 힘들었다. 원래도 식욕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때는 정말 달랐다. 허기가 져야 음식 맛이 날 텐데 어디가 고장 났는지 하루 종일 굶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우울증을 다룬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멜랑꼴리아>에서 잘 익은 스테이크를 먹던 주인공이 갑자기 모래 씹는 맛이 난다며 엉엉 울던 장면이 떠올랐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혼자 제주도로 향했다. 환경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지 않을까 하고. 마음이 건강하지 못해서 겁이 늘었는지 그때는 평소 아무렇지도 않던 비행기마저 무섭게 느껴졌었다. 하늘에서 비행기가 폭발하면 어쩌지? 추락해서 바다에 떨어지면? 바다는 춥고 수영도 못하는데? 이전에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다행히 낯선 제주도에서 인생 고민을 끄고 다른 일을 시작하자 상황은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고 태풍을 부르는 제주도 날씨 탓에 해가 없으면 서울에 있을 때보다도 기분이 안 좋았다. 강한 제주도 바람에 비까지 내리자 화장실이 방 안에 있는 원룸형 숙소는 습기로 가득 찼다. 방에서도 옷에서도 눅눅한 냄새가 났다. 나름 거금 들여 찾아온 제주도인데 내 돈 주고 감옥에 갇힌 꼴이라 또 한 번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런데 인간은 정말로 정신에 지배당하는 모양이다. 드디어 날이 개고 짱짱한 해가 나타나 5분 거리 숙소 앞바다로 나가보았다. 물 위에 일렁이는 햇살이 반짝이며 반사되는 걸 보고 있자니 속이 뻥 뚫리면서 아픈 게 사라졌다. 날씨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할 때 억지로 먹던 중식집 밥도 그날은 맛있었다. 자전거를 빌려 해안도로를 돌다가 길을 잃어 피곤에 절어 돌아왔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제주도에 머무는 3주 동안 해가 뜬 날은 다 합쳐도 일주일이 안 됐다. 맑은 날이 귀해 모든 일정은 날씨에 맞췄다. 어젯밤 미리 세운 계획이 있어도 아침에 해가 뜨면 전부 취소하고 무조건 밖으로 나가는 거다. 제주도 날씨는 시시각각 변해 갑자기 나빠지기도 한다. 그럼 그날은 야심 차게 나선 일탈을 취소하고 다시 방 안에 틀어박혀야 했다.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계획이 있어서 따로 스케줄 관리를 했었는데, 흐린 날씨 덕에 겨우 목표를 달성했다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3주 간 제주도 생활은 나름 즐거웠지만 사실은 2주 차부터 너무 집에 가고 싶었다. 나조차도 그 마음이 황당해서 빈공책에 집에 가고 싶은 이유를 적어보기도 했다. '단벌 신사로 지내는 게 지겹다', '공기가 너무 습하다', '보일러를 튼 건조한 방이 그립다', '바람이 무섭다. 바람 불지 않는 도시가 좋다'등 나열하고 나니 별거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는 다시 취업을 했다. 또 익숙한 삶이 시작됐고 1년 넘게 이어가는 중이다. 여전히 일상은 작고 바쁘기만 하다. 지치는 속도는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는 거 같다. 힘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했다. 작년의 목표는 우회로에서 벗어나는 거였다. 방향을 틀어 새로 자리 잡은 일상에 권태는 또 금방 찾아온다. 지금은 삶에 만족하는 법을 찾는 중이다. 그동안 찾지 못했던 해답을 이제는 찾을 때가 된 거 같다. 오지도 않을 미래로 현재를 낭비하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다. 만족스러운 삶이란 뭘까. 여전히 모르겠다. 그동안 우회로에 갇혀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뱅글뱅글 도는 기분이다. 망했다. 또 시작이다. 어쩌면 나, 생각보다 포기를 모르는 사람인지도.


++2월에 써두었던 글이다. 4월을 마지막으로 지금은 다시 갓길로 벗어났다. 풍경은 또 바뀌었고 이제 세상이 변하는 속도는 살벌하게 느껴질 정도다. 지금은 저번보단 낫다. 좀 더 강해진 기분이다. 현재 목표는 우회로를 찾을 때까지 버티는 거다. 타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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