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아름다움과 놀라움을 지닌다. 그러면서도 수수께끼와 같다. 영원해 보이면서도 인간적인 온갖 나약함과 병, 위험들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언어는 이를 사용하고 배우는 우리들에게 가장 신비스럽고 외경스러운 사실이다.’
그러나 언어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바라본 세상엔 아우성만 가득하다. 분노와 타도의 언어는 있을지언정 세상을 바꾸는 감동의 메시지가 없다. 구르고 부수며 웃음을 쥐어짜는 언어는 있을지언정 축약과 감탄과 위트는 드물다. 위정자들의 언어는 어떤가? 편을 가르고 싸움을 붙이는 언어는 있지만 비전과 성과를 설파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거친 논평과 천박한 비방, 낯 뜨거운 옹호와 나약한 자조 속에 리더십의 언어는 이미 명을 다한 듯하다.
얼마 전 본 다키스트 아워란 영화가 생각난다. 독일의 침공에도 영국 의회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승리의 언어를 가진 남자 처칠이 이들을 설득한다. 그리고 그 설득의 힘은 시민들의 확신에 찬 언어로부터 나왔다.
과장된 감정과 속된 표현이 ‘인간미’의 발로로 추앙받는 시대의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입을 자주 열지는 않지만 열기만 하면 열정과 희망을 언어를 쏟아내는 리더십을 접한 지도자들이 기억나질 않는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공허하게 들린다.
칼릴 지브란은 생각을 ‘우주 속의 한 마리 새’로 표현하며 ‘새는 언어의 우리 안에서 날개를 펼 수는 있지만 날수는 없다’고 했다. 입술의 언저리에서 뿜어지는 거친 말장난은 죽은 사고의 증표다. 그런 언어로는 가슴을 움직일 수도, 세상을 바꿀 수도 없다. 폭력이자 횡포이며 불만과 무능을 대변할 뿐이다. 리더십의 시작은 비전이고 끝은 성과임을 알리는 언어, 희망과 도전과 승리의 메시지로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리더의 언어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