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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 Dec 11. 2021

매그놀리아

찬란한 봄과 무성했던 여름

나의 아침 루틴은 뒷 베란다에 앉아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목련나무를 바라보는 것이다.


작년 가을에 이사 온 후 올봄 처음 만난 뒤뜰 목련은 매일매일이 경이로움과 찬란함  그 자체였다.

2월부터 두근두근 조금씩 터져 나오는 꽃몽우리를 바라보고 하나하나 눈인사를 하느라 3월, 4월.. 어떻게 시간이 갔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얀 꽃이 무참히 저버렸다는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푸르고 반짝이던 이파리들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커다란 잎들이 켜켜이 무성해질 땐  무한의 기쁨 같았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목련은 그런 때가 곧 올 것이라고, 그것이 순리라고 나에게 타이르듯 얘기해 주었다.

나는 하얗고 고귀하게 빛나던 목련 꽃, 무서울 정도로 푸르고 무성하던 잎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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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그렇게 가을이 오고.. 누렇게 변하고 힘이 없어진 잎들을 보기가 괴로웠다.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소녀처럼.. 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기가 괴로워서 한동안 뒷베란다의 창을 내다보기가 힘들었다.


한참 어렸던 때에 읽었던 이 시가 올 가을을 같이 울어줄 줄은 몰랐다.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를 하루에도 몇 번씩 읊조려야 했다.

작업해야 하는 하얀 종이를 보며  기형도 시인이 느꼈을 공포도 느껴야 했다. 무기력으로 손에 잡히질 않는.. 시작을 못하는 공포.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다시 문을 잠그는 무참함.


세 달을 꼬박 앓고 어제는 겨울 안개가  나의 창을 떠돌았다.


그리고 지금 바라보는 목련나무는 또 다른 경이를 준다.   

비록 이파리들은 쇠락했지만 손가락 마디만 한 통통한 꽃눈이 한가득 맺혀있다.

겨울이 아닐 때부터 시작된 발아.

조그만 털옷 안엔

또 다른 무아지경의 세계를 품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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