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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몬트 May 16. 2024

봄 : 우리도 사랑일까

사랑은 하나의 순간인가 지속인가

세라 폴리 감독, 원제: Take This Waltz, 2011




첫 장면이 시작되고 한 여자가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분주해 보이는 그녀와 그녀를 사정없이 비추는 햇볕이 담긴 장면이 길게 이어진다. 요리를 오븐에 넣고 다 되기를 기다리며 조금은 지친 듯한 얼굴을 한 그녀 뒤로 남편처럼 보이는 남자가 주방으로 들어선다. 서로의 존재가 햇볕에 부유하는 공기처럼 당연하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대화도 없다. 그렇게 영화의 첫 장면이 끝난다.


이 첫 장면을 보면서 아주 쉽게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질 거라는 직감이 들었는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다 보고 나서도 역시나 좋았다.




사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그리는 전개는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결혼 생활 5년 차인 마고는 자상한 남편 루와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 생활의 안정감이 마고에게는 권태로 다가오게 된다. 이웃집 남자인 대니얼과의 우연인 듯 운명인 듯 반복되는 마주침과 그때마다 서로에게서 느끼는 강렬한 끌림은 이러한 권태를 더 부추긴다. 두 남자 사이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마고는 결국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움을 선택한다. 하지만 "낡은 것도 한때는 새것이었지"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대니얼과의 관계도 더 이상 새롭지 않게 된다. 이제야 알겠다는 듯 후회의 깨달음이 마고의 얼굴을 스친다.


이렇게 보면 경우에 따라서 영화의 소재는 불륜이 되기도, 한 여자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되기도, 혹은 사랑의 다양한 면면을 그린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사랑 그 자체에 더 다가가려는 시도에 있다. 





사랑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너무나 예전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에, 세월을 거듭하여 수많은 천재적인 이들이 사랑에 대해 어떤 정의를 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랑에 대한 완벽하고도 완성된 정의를 내리지는 못 했으며, 여전히 그 시도는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니 지금으로서 우리는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차라리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마고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냐를 따지는 것은 이 영화가 던지는 진정한 질문은 아니다. 지난 시간 동안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상생을 위해) 관계에 나름 규칙을 정해둔 현재 체계가 난센스라 여겨진다면, 마고에 대해서도 그저 감정에 따라 움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은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고는 덜 사랑하게 된 사람보다 더 사랑하게 된 사람을 선택했을 뿐이다. 





대신 영화는 덜 사랑하고 더 사랑함의 기준을 오래되고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차이로 둔다. 이것은 실은 사랑으로 국한할 수는 없는데, 사람은 으레 대상이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낡은 것에 소중함을 느끼기보다는 새로운 것에 더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은 사랑의 속성이기보다는 사랑을 하는 주체인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형태가 없는 감정 자체에 선악이 내재되어 있던가? 규칙이 필요하여 사회가 임의적으로 정렬한 것일 뿐,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도 감정 자체일 수는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자꾸만 사랑을 통해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그 무언가란 보통 보다 나은, 보다 완벽한 나, 그리고 우리일 것이다.


혼자서도 살 수 있고 충분하다면 전략적으로 사랑을 하지 않는 편이 더 효율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한다. 대개는 사랑을 통해 혼자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사랑을 한다. 이를 통해 설령 다른 무언가를 잃을지라도 그 상실 또한 얻음의 과정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사랑에 대해 이렇듯 기대하는 심리는 나아가서 새것을 보면 이끌려 그것을 필시 운명이라 합리화하는 인간의 본성과도 합쳐질 수 있다. 당연히, 그리고 얼마든지.





문제는, 사랑은 우리에게 그 어떠한 것도 주지 않는 데에 있다.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이어서, 독립된 두 인간을 연결해 주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두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만약 완벽해진다 느낄지라도, 완벽이라는 것이 달성이 되면 다시 그것은 상대적으로 무언가를 더 채워야 하는 부족한 것이 되어버리고, 또 다른 완벽을 찾게끔 한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여정을 통해 내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시간이 지나 완벽해지고자 선택을 한 이에게 미련과 후회만이 과녁을 통과한 화살처럼 관통하는 것이 될 뿐이다.


그러면 사랑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먼 예전부터 찾아 헤매왔지만 애석하게도 '모른다'이다. 아마 답을 찾게 된다면 인류는 그때부터 사랑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성공한 사랑만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은 빈틈이 많아서 그것을 미친 사람처럼 채우려 할 수가 없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사랑 자체는 우리가 잘 모르니 차치해 두더라도) 인간이 하는 사랑'행위'에도 빈틈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 빈틈 사이로 내리쬐는 볕이 나를 짓누르더라도, 태양 아래 있을 뿐인 인간이 그것을 미친 듯이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첫 장면으로 전환된다. 마고가 느끼는 사랑의 첫 번째 권태라고 생각했으나, 마지막 장면을 통해 두 번째 권태가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결국 권태란 새로운 사랑으로 덮어서 완벽한 사랑을 기하려는 마고의 노력이 그녀를 내리쬐는 볕처럼 소용없었음을 알려준다.


어쩌면 그 빈틈을 조용히 응시하는 것만이, 최대한 성공한 사랑에 근접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븐을 가만히 바라보는 마고의 모습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동일하지만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용히 응시하는 방법을 그때는 몰랐고 이제는 알게 되었지만, 그녀 앞에는 아직도 수많은 하루하루가 놓여 있다.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이 왈츠가 지속되는 동안은, 계속해서 도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시간을, 이 순간을 옆의 사람과 힘껏 사랑해야 한다. 이 왈츠가 끝나기 전까지는.



The Buggles, Video Killed the Radio 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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