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리스틴 May 09. 2023

이토록 평범한 미래 - 어딘가에 도착할 운명


p.29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p.30

용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지금 미래를 기억해, 엄마를 불행에 빠뜨린 아버지와 그 가족들을 용서하길 바랍니다.


p.34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건 놀라운 말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말이더라.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우리는 죽지 않고 결혼해 지금 이렇게 맥주를 마시고 있잖아.

줄리아는 그냥 이 사실을 말한 거야.

다만 이십 년 빨리 말했을 뿐, 그 시차가 평범한 말을 신의 말처럼 들리게 한 거야.






“이번 대운은 좀 힘들어. 다음 대운.. 그러니까 8년 후부터는 지금보다 나아질 거야.”

한참 사주를 자주 보러 다니던 시절, 어느 철학관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좋은 말은 철석같이 믿고 안 좋은 말은 한 귀로 흘리는 법을 터득한 후부터 나는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8년 동안 뭘 해도 힘들고 일이 잘 안 풀린다면,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노력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대충 되는대로 살면서 8년이 지나길 기다려야 하나? 

이런 생각 끝에 내게 유리한 결론을 내렸다.’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고 사주는 재미로 보는 거야!’


시간이 한참 흘러서 알았다. 그 철학관이 참 용한 집이었구나. 내 삶은 무엇하나 쉬운 게 없어서 항상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친구들이 ‘파란만장 미스 최’라는 별명을 붙여줄 만큼 내 일상은 바람 잘 날이 없었고 항상 위태로워 보였다. 


지하도에서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오를 때 너무 힘들면, 고개를 들어 남은 계단을 확인하지 않는 게 속이 편하다. 지금 발 밑의 계단만 보고 다리를 움직이다 보면 머지않아 밖이 보일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만 생각하자. 8년 동안 힘들 것이고 8년 후에 나아질 거라는 말, 나는 발 밑의 계단만 보면서 이 말들을 모두 흘려보냈다.


어느새 철학관의 예언은 너무나 평범한 말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잘 살아있고 이런 글을 쓰는 걸 보면 그때보다 훨씬 나아진 것 같다. 파란만장했던 기억은 다채로운 무지개빛깔이 되었다. 만약 그 당시에 미래를 기억했다면, 지금의 나를 기억했다면 나는 조금 덜 힘들었을까. 과거보다 나아진 지금의 상황이 어린 나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혹은, 장차 겪어야 할 것들을 보면서 지레 겁을 먹지는 않았을까.


그럼에도 모든 미래는 참 평범할 것이다. 과거와 다름없이 평범하게 겁을 먹고 평범하게 슬퍼하다가, 평범하게 누군가를 만나 평범하게 어딘가로 떠나겠지. 그러니 오늘의 계단에서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아니, 멈췄더라도 잠시 심호흡을 하고 다시 발을 내딛으면 된다. 우리는 기어이 어딘가에 도착할 운명이므로.

매거진의 이전글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