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81
함석지붕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p.90
혹시 날이 밝으면 이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 자다가 깨고, 또 자다가 깨서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러다가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또 움직이면 그가 깰까봐 꼼짝도 못하고 듣던, 그 빗소리 말이다. 바로 어제 내린 비처럼 아직도 생생한, 하지만 이제는 영영 다시 들을 수 없는 그 빗소리.
p.23
만약 당신이, 어떤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의 존재 따위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어떤 한 사람 때문에 자꾸 자신이 변하게 된다면 당신은 이미 그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
어느 날, 내 삶이 새로 시작되었지만 거기에 나는 없었다. 당신만 있고 나는 없었다. 오로지 당신을 통해서만 내가 있다는 게 확인될 뿐이었다. 내가 미처 선택할 틈도 없이 내 삶은 그렇게 바뀌었다.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다가왔다. 이는 우발적인 게 아니라 예견된 것이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나를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뭔가를 가졌다.
그들에게선 특유의 냄새가 났다. 겨울의 차갑고 건조한 바람에 묻어있는 온기 같은 냄새. 순식간에 지나가버려서 또 언제 맡을지 모를, 찰나의 따스함을 닮은 향이다. 그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똘똘 뭉쳐진 마음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온다.
나는 상처 입은 것들이 풍기는 향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사방으로 둘러친 철조망처럼 날이 선 뾰족함. 냉정한 마음 한편에 숨어있는 연약함. 야생의 생존 본능과 다름없는 예민함.
자석의 강력한 자기력을 거부하지 못해서 이끌렸다. 가시 같은 그들은 다가오는 나를 경계하다가 조금씩 허물어졌다. 나는 고단한 하루 속의 휴식이 되기를 바라면서 내 어깨를 기꺼이 내어주었다.
칠월의 솔처럼 빗소리가 높아지면 내 모든 감각은 그를 향했다. 나는 원래부터 생각도 의지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상대방에게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그런데 함께하는 시간이 별처럼 반짝일수록 혼자만의 어둠도 짙어져 갔다. 이 순간을 영원토록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게 괴롭고 그럴수록 별은 더 잔인하게 반짝였다. 반짝임 속에서도 캄캄한 외로움이 밀려와서 반사적으로 쓴웃음이 퍼졌다.
어느 누구도 밑 빠진 독과 같은 마음을 채워줄 수 없다. 원하는 걸 얻으면 채워질 것 같은 마음은 금세 모습을 바꿔 새로운 걸 요구할 테니까. 욕망에 잡아먹히면 사랑은 사라지고 오직 집착만 남는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나무가 되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 그늘을 만들어주고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곳이 되자. 어둠 속에서 아무리 혼자이고 싶어도 그 누구도 혼자일 수가 없다. 이미 나무 곁에는 하늘과 바람과 해와 별이 있지 않던가.
나무는 하늘에게 집착하지 않고 바람에게도 집착하지 않는다. 영원히 함께 하면서 서로를 지켜봐주는 사랑. 날카롭고 위태로운 자석 대신, 푸근한 나무 같은 사람과 나무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