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21
서른이 넘어가면 누구나 그때까지도 자기 안에 남은 불빛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게 마련이고 어디서 그런 불빛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한때나마 자신을 밝혀줬던 그 불빛이 과연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p.135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뭔가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다음에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 괴로운 일만 남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없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위안이 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p.22
혼자서는 코뿔소가 될 수 없었다. 노든이 코끼리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코끼리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코뿔소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코뿔소들이 있어야만 했다. 다른 코뿔소들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노든을 코뿔소답게 만들었다.
한 때 곁을 내줬던 사람들은 제 몫을 다해 반짝이다가 내 세상에서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내가 잡고 싶었든 놓고 싶었든, 때가 되면 인연들은 기어코 사라졌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불빛을 잃어버릴까 두려웠다. 까만 어둠만 피할 수 있다면 뭐든 해야 했다. 그러다 불빛이 사라지면 나는 한참동안 꽁무니를 쫓았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뭔가가 나를 살아가게 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겠다.
행복했던 찰나의 기억을 수만 번 되새기면서. 괴로운 기억엔 몸서리치며 벗어났음에 안도하면서.
이미 사라진.. 있었는지조차 희미해진 것들을 부여잡고 긴긴밤을 보냈다. 내가 잡고 있던 것들, 그러니까 사라진 불빛은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도구였다. 불빛에 마음이 생채기를 입고 나서야 나는 자신을 규명할 수 있었다.
나는 자유롭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거부했고 한계 짓는 걸 참을 수 없는 사람이며 불확실한 모험과 미지의 것들을 사랑했다. 코뿔소 노든을 코끼리로 살 게 한 건 다른 코끼리들이었고, 코뿔소로 살게 한 것도 다른 코뿔소들이다.
스쳐간 인연들 역시 나를 여러 모습으로 살게 했다. 혼자서는 코뿔소가 될 수 없듯 우리도 혼자서는 자신이 될 수 없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본연의 모습으로 바다를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되었으리라.
지루했던 긴긴밤은 기나긴 낮이 되어 속속들이 비추는 불빛이 되기를. 그래서 빛나는 바다와 만나게 되기를. 오늘도 그 무언가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