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어느 날, 결혼기념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미리 휴가를 내고 한강이 바라보이는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지만 평화로웠다. 침이 고이는 브런치와 여름을 물리치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배를 채우는 동안 우리는 세월의 흔적을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많이 자랐고 우리는 머리에 흰색 머리카락을 하나씩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이 듦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사십 대를 살아가는 만족도가 다른데, 우리는 대체로 편안하게 여긴다. 우리의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하나씩 생길 때마다 아이들의 키와 몸무게는 조금씩 부풀고 지식과 독립심도 커진다. 아이들은 부모의 나이를 먹고 자란다는 말은 어김없는 정답이다.
오후에는 다산 현대아웃렛에 갔다. 곧 있을 여름휴가에 가족 티셔츠나 하나 장만할까 싶어서였다. 몇 군데 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옷은 없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사이즈가 없고 사이즈가 있으면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것이나 살 수는 없었다. 대충 산 옷은 옷장 속에 묻힐 게 뻔하니까.
다산 현대아웃렛에는 <부쿠서점>이라는 동네 책방 느낌의 서점이 있다. 훗날 결혼기념일을 추억할 책을 하나 살 생각이었다.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면서는 "이 정도 나이 되면 결혼기념 선물로 아파트나 땅을 하나씩 사야 되는데..."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쏟았는데, 현실은 책을 하나 사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결혼기념일에 걸맞은 적당한 선물을 살 수도 있지만 아내와 나는 그다지 필요한 무엇인가 없었다.
결혼기념일이 끝난 며칠 뒤 아내는 다이슨에서 나오는 헤어드라이어(?)를 주문했다가 다시 반납했다. 결국 우리는 결혼기념일에 대단한 선물을 사지 않았다.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결혼기념일을 이렇게 평범하게 보내냐고 물을 수 있다. "항상 대단하게 보내지는 못해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평범한 결혼기념일도 누군가에겐 대단한 호사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겐 불만일 수 있다.
다시 결혼기념일 이야기를 하면 서점을 다니면서 내가 산 책은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가 쓴 <아내를 모자로 생각한 남자>다. 저자는 정신에 문제가 생긴 환자를 다룬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내가 감사해지는 책이다. 올리버 색스의 책을 읽으며 오래전 읽은 책이 되살아났다. 할레드 호세이니가 쓴 소설들이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미군은 철수하고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지금 시끄러운 그 나라다. 아프간 국민은 인권이고 생명이고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한다. 그가 아프가니스탄 출신이라서다. 여자는 남자의 것이고 자식은 부모의, 특히 아빠의 것이다. 어렴풋이 노예도 있었던 것 같다. 밤에 잠을 자다가도 폭탄이나 총소리가 나는 곳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나라다. 책을 읽는 동안 연민을 느끼며 주인공을 따라갔다. 주인공이 꼭 역경을 이기고 행복한 삶을 찾기를 바랐다. 어떤 주인공은 그렇게 됐고 어떤 주인공은 나의 눈가에 이슬을 맺게 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라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기록하지 않는 독서를 한 때라 더 아득하다.
그 책들은 모두 당시 나와 친한 지인들에게 갔다. 지금은 좋은 책은 소장을 원칙으로 하지만 그때만 해도 좋은 책은 좋은 사람에게 나누는 거라 생각했다. 하나 더 사주면 될 것을,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다.
나는 그 책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최소한 잠을 자는 동안에는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살고 있는 자체가 고마웠다. 분단된 국가지만 전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 아이들을 이유 없이 납치하거나 죽일 수도 있다는 끔찍한 상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혼기념일에 대단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호사다.
그렇다고 결혼기념일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무엇인가 특별한 걸 하되, 여건이 되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했더라도 불만을 쌓을 이유는 없다는 거지요. 다음에 하면 되니까요. 우리는 준비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에서 살잖아요.
1년에 한 번 있는 결혼기념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엇인가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도, 시간이나 다른 여건이 허락지 않아 하지 못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강을 바라보며 맛있는 음식과 커피 한 잔 나눈다는 그 자체가 엄청난 행복이라는 걸 그 옛날 소설을 통해 깨달았다. 할레드 호세이니에게 감사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 최근에 나온 신작 <바다의 기도>도 얼른 구입해야겠다.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를 하니까 최근의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이민에 부정적이다. 뉴스에는 이민 온 사람과 외국인 노동자의 범죄를 크게 다룬다. 누군가의 머리에 부정적 선입견을 집어넣는다. 통계적으로 이민자 1인당, 외국인 노동자 1인당 범죄율과 내국인 1인당 범죄율을 비교하는 보도는 찾기 어렵다. 언론이 다루는 뉴스는 늘 자극적이어야 하니까.
아프가니스탄인 이민을 받아들이지 말자를 판단하기 전에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알면 좋겠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으며 그들이 처한 상황은 어떤지. 비록 오래됐지만 할레드 호세이니의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혹여나 정부 정책을 담당하거나 정치를 하는 분이 이 글을 읽는다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들에게 제공하는 물적 지원이 있다면,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국민과 청년층과의 형평성은 따져보고 정책을 결정하면 좋겠다. 특히 그 물적 지원이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된다면 더욱더 섬세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자칫 국민을 설득하기는커녕 국론만 분열시킬 수 있으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나 봅니다. 결혼기념일 이야기에서 아프가니스탄 이야기까지 온 걸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