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2,000만 달러의 소위 말하는 B급 영화로 시작해서 전 세계가 기다렸던 시리즈로 끝난 영화 존 윅 시리즈. 이제 영화는 스핀오프격의 5편이 개봉하기를 전 세계 영화팬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고 있다.
종결 편이라 할 수 있는 4편에서 존 윅이 죽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5편에 주인공 존 윅역의 키아누 리브즈가 출연하지만 스핀오프작이라 그 이야기는 3편과 4편의 중간 정도의 시간적 배경을 가지고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B급 영화답게 시작되고 있는 이 영화는 전설의 킬러 존 윅이 은퇴를 하고 아름다운 아내 헬렌과 결혼하여 그야말로 영화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신파극처럼 그 행복은 아내의 불치병으로 깨지고 되고 시한부 삶을 살고 있던 아내는 자신의 장례식이 끝나고 택배를 통해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하며 자신을 기억하며 남은 남편이 행복한 삶을 살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그 고독한 행복(?)도 잠시 좀도둑이 들어 죽은 아내가 선물한 강아지를 죽인다.
이제 전설의 킬러는 묻어두었던 무기를 캐어 들고 세상 밖으로 나간다.
자신과 아내의 영혼의 행복을 깬 무법자를 처단하러.......
이렇게 영화의 시작은 전형적인 B급 영화였다. 하지만 4편까지 보면서 점점 이것 봐라 저예산 킬링타임용 액션 영화치고 너무 철학적인 내용이 아닌가? 아! 그렇지 저건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이지. 아! 이건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이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 그 '존 윅'시리즈의 놀랄만한 철학적 세계관에 대해서 간략하게(정말 간략해야 한다 안 그럼 내가 감당 못할 분량이 될 테니깐 말이다.) 알아보자.
이 영화는 유난히 반려견이 많이 나오는 영화다.
소위 말하는 개가 판치는 개판인 영화이다.
그럼 왜 이 영화에서 반려견이 중요했을까?
난 여기에 이 영화의 진정한 철학적 가치가 숨겨져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인간들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따르면 비본래적인 현존재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클럽에서 엄청난 총싸움에도 아랑곳없이 술과 약에 취해 음악에 몸을 흔드는 존재들, 실시간으로 뜨는 살인청부 금액에 눈이 멀어 자신이 죽든 말든 전설의 청부 살인업자에게 겁 없이 들려 드는 소위 말하는 킬러들, 돈과 권력을 쥐고 있지만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위해 불나방처럼 불빛 위아래를 미친 듯이 날아다니는 빌런들.
이들은 인간의 세계에 존재하는 현존재로써 세계-내-존재로써 실존의 불안을 몸소 느끼고 각성해서 본래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 속에 모든 것들을 기만하며 그저 무의식에 의존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한마디로 살아도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마지막 4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에서 영화가 전하는 철학적 메시지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존이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의 아내를 기억하는 자상한 남편의 존재로 남고 싶은 의지.
케인이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의 딸과 조용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지키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그 소박한 자유로운 삶의 비극적 현실의 본보기라 할 수 있는 코지와 아키라.
5,000만 달러라는 거액의 목표를 위해 킬러 생활을 하지만 정서적 반려견과 함께하는 젊은 킬러.
최고 회의의 대리인으로 자신이 그들의 세계의 왕인 양 개똥철학을 시전 하지만 결국 그 오만에 죽음에 이르는 그라몽 후작.
그 외 죽음을 불사하고 현상금에 목숨을 내던지는 킬러들. 무슨 난리가 나든지 상관하지 않고 길을 지나가는 수많은 '우리들'들을 통해 영화는 너무나 확실한 단 한 가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라몽 후작이 목적이 있는 존재와 목적이 없는 존재를 운운하며 결국 명확한 목적을 가진 자신의 승리를 자신하지만 결국 목적이 없는 존 윅이 이기게 되는데, 원래 인간 존재의 목적은 애당초부터 없었던 것이고 어쩌면 그 목적이라는 것이 우리가 쉽게 말하는 이데올로기로 명확한 실재 없이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 겪었던 그 흉측했던 사건들이 아닐까 한다.
예전에 국기에 대한 맹세나 교과서 맨 앞장에 있던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문자의 텍스트 안에는 우리를 어떠 어떠한 목적을 지닌 존재로 규정을 하고 있다. 어떤 목적을 가진 존재는 필연적으로 도구적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존 윅'에 등장하는 빌런들 또는 그 좀비 같은 수많은 군중들은 목적과 도구적으로 규정된 소름 돋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존과 케인 그리고 코지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권태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소소함을 위해 목숨마저 내놓고 외롭게 투쟁하는 인물들이다.
영화를 보면 그래 욕망에 찌든 좀비 같은 인간들보다야 저렇게 인간적인 모습의 주인공이지 하겠지만 우리들 스스로의 존재의 단면을 슬라이스해보면 우리들 역시 그 추악스러운 모습의 그들 중 하나일 뿐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 유명한 '논어'에서처럼 영혼에 대하여 묻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논어에서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과연 죽은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철저하게 유물론자였던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사람 마음도 모르는데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귀신의 세계를 어찌 알겠느냐"
영화에서도 목숨을 담보로 한 결투를 신청하고 같은 운명에 존과 윈스턴은 처하게 된다.
교회에서 어쩌면 죽은 아내 헬렌을 위한 마지막 추모가 될지 모를 시간을 가지고 나온 존에게 윈스턴은 신(神)의 존재를 묻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존은 답한다. "믿지 않지만 존재할지도 모르겠지요. 그렇담 아내는 나의 이야기를 듣겠지요."
확신하지 못한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유물론자들의 가장 명확한 답이 아닐까 한다.
20세기 니체의 '신의 사망선고'를 받아들인 우리는 플라톤 이후 그토록 원했던 완벽한 세계로의 영혼 이전이 그저 허구적이며 폭력적인 사상들의 횡포로 인정하였다.
그 후 우리는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라는 욕망의 부추김 속에 현실이 주는 위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타인의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환상에 젖어 극악의 소비지향적 세계에 자신을 극한 노동 또는 채무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하여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제 답은 나왔다.
이처럼 자기 성찰이 있는 따뜻한 삶이 가능하게 되는 이유가 사랑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반려견과 함께하는 장면이 중요했다고 말한 것이 그런 삶으로 우리를 유도하는 것이 반려견과의 따뜻한 정서적 교류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다.
우리는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주어진 삶에서 사랑의 가치를 실현하며 묵묵히 정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허무한 외침이 될 수 있겠지만 달리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 예수님 등이 위대한 이유이다.
그것은 타인의 욕망 속에 기만적으로 존재하는 좀비 같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과 그 한계인 죽음을 늘 인식하며 주어진 시간 안에서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
쉬운 이야기이지만 행동하기 매우 어려운 그것이 자기 기만의 때로 물든 우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닌가 싶다.
어차피 우리는 태어난 이상 죽음으로 향해가는 존재이기에 무엇을 목적하고 이루기 위한 수단 궁리를 하는 것보단 사랑의 실천을 통한 행복의 가치 추구가 인간존재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영화 '존 윅'의 존과 케인 그리고 코지를 통해 느끼고 배우며 또한 영화 한 장면에 스쳐 지나가는 우리들의 초상과도 같은 그 수많은 모습에 소름을 느끼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