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듯 말듯한 그의 철학들
중국의 고대 병법서 하면 우리는 손자병법( 孫子兵法)을 먼저 떠오르게 된다.
아무래도 위진남북조시대의 초기 우리가 삼국지로 하는 위. 촉. 오나라를 다시금 통일한 조조가 주석을 달고 (손자약해) 당시 전장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와 그 후에도 많은 주석서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손자가 활약했던 춘추시대보다 더 한 싸움을 벌여 오죽하면 전국(戰國) 시대라 칭했던 시대 병법으로 손자 못지않은 명성을 얻은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오기(吳起)이며 그를 공자. 맹자. 노자. 묵자. 한비자처럼 이름에 자子를 붙여 높여 부르니 오자(吳子)가 된다.
공자나 한비자. 순자처럼 정사에 많이 등장하거나 역사적 또는 사상적으로 큰 업적을 이룬 자들은 역사적 인물로 인정하지만 그 외 노자. 오자. 손자 심지어 귀곡자라는 다소 기이한 이름의 사상가들은 역시나 그들이 실존 인물이냐 아니면 가상의 인물로 그를 따르는 후대의 사람들이 그 이름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펼친 것이냐는 논란이 늘 존재해 왔다.
오자 또한 그럴 것이 그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적은 고대의 죽본은 없고 사마천의 사기나 한비자의 한비자 등에 그의 삶과 철학이 조금이 인용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그가 지었다던 오자병법은 총 46편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도국(圖國), 요적(料敵) ,치병(治兵) ,논장(論將), 응변(應變) 6편으로 이마저도 무경 칠서의 한 텍스트로 전해질 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당연히 그가 실존이었냐 아니면 가상의 인물이었냐에 대한 논란을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중국 고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춘추시대 말미 오(吳) 나라와 월(越) 나라 사이의 그야말로 복수의 대서사시라 할 수 있는 시대. 오왕 합려와 부차를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와 함께 춘추오패 중 하나로 만들고 모함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오자서와 혼돈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손자 오기 열전으로 함께 묶어 소개했기 때문으로 더욱 그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이 손자 오기 열전이 5편이고 바로 6편에 오자서열전이 나오기 때문에 자칫 둘을 정확하게 구분 짓지 못해 오왕 합려. 부차 그리고 월왕 구천이 이야기는 언제 나오나 하며 책을 읽다가 워낙 적은 책의 분량에 위나라 문후와 무후만 나오고 끝나는 허무함에 인터넷 검색을 하는 일이 잦을 듯한데 이에 대해 명확히 소개하자면 오자서는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춘추시대 말미 활약한 군사전략가이고 오기는 그보다 100년 뒤 정도에 활약한 정확히 구분하자면 삼진(三晉)이 위. 한. 조나라로 갈라선 BC403년 이후인 전국시대 위나라와 노나라 그리고 초나라에서 활약한 군사전략가요 재상을 역임한 정치가가 되겠다.
특히, 오자는 사마천의 '사기'와 한비자의' 한비자'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그 평이 둘의 관점에 따라 극도로 갈려있다.
사마천의 경우 한(韓) 나라는 유학이 국가 정치이념이 된 마당에 증자(공자의 제자로 유학이 후대에 두루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에게 인정머리가 없다는(과거 행실과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지 않은 점) 이유로 의절당한 오자를 좋게 봤을 이유가 없으므로 상당히 원색적인 내용이 많으며 반대로 인간의 호명지심에 주목했던 한비자는 그의 생각과 일맥상통함이 있는 오자의 사상에 공감하여 오자병법과 그의 사상을 긍정적인 목소리로 자주 언급하고 있다.
물론 청년기 시절 방탕했던 삶과 제나라 출신 아내를 죽여 제나라와 전쟁을 준비하는 노나라의 장수가 되고 했던 일화 등은 한비자에는 언급되었던 적이 없던 일화로 오자는 사마천의 붓에 의해 출세를 위해 의(義)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뢰한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오자병법(吳子兵法)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마무리 짓고자 한다.
먼저 오자병법 하면 가장 유명한 대목은 바로 이순신 장군이 이야기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必生卽死)의 논리이다. 이는 오자가 오자병법에서 언급한 것으로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 幸生則死)는 '반드시 죽으려 하는 자는 살고 요행히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라는 말을 이순신 장군께서 결사항전의 마음으로 인용하여 더욱 극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되겠다.
또한 오자병법 요적(料敵)에서는 병법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허허실실을 논하며 '강을 건너고 있는 적은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위 문후에게 고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아는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사자성어와는 정반대의 상황인데, 개인적인 의견으로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 초기 송양공이 강을 건너는 적(초나라)을 공격할 것을 그의 이복형이자 재상이었던 목이가 청하는데도 군주의 도(道)를 운운하며 상대가 제대로 정비할 틈을 주고 싸움에 임해야 한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 적에게 패하고 마는 상황이 여러 사서(史書)에 나온다.
당시는 제자백가의 사상이 꽃을 피기전으로 아직은 제후국들이 각자의 도(道)를 행함이 있던 시대로 후대 송양지인으로 불리며 어리석은 객기로 밖에 취급되지 않는 웃음거리로 전락했지만 당시는 제후국 간에 예(禮)가 있던 시대였고,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이제 강을 건너는 적은 필히 공격해야 하는 대상으로 공공연히 말하는 것을 미루어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공자가 말했듯이 모든 예(禮)가 무너진 강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시대임을 더욱 깨닫게 되는 사료가 아닌가 싶어 씁쓸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마천은 오기를 무척이나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묘사했는데 그런 그 조차도 병사들과 함께 행군을 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자신의 짐을 손수지고 다니며 종기가 난 병사의 다리를 직접 빨아주는 애민(愛民)의 정신이 돋보이는 사람으로 인화(人和)의 가치를 중시하는 휴머니스트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위에 소개한 요적(料敵) 편에 그런 그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 뭉클해지는 내용이 있어 소개하고 마무리한다.
반드시 공격해야 할 적을 꼽으며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공격해야 할 적을 언급한다.
"첫째로 사나운 바람이 불어닥치는 엄동설한에 아침 일찍 일어나 행동을 개시하여 얼음을 깨며 강을 건너면서 부하의 고생을 조금도 돌보지 않는 무리를 감행하는 적군의 경우입니다.
둘째는 한여름 폭염에 목이 마른 군대를 무리하게 먼 거리를 행군시키는 경우입니다."
위 두 가지 명심하고 나와 내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 친지. 동료들을 나의 이기심으로 힘들게 하고 있지 않은지 잠을 자고 나면 국가 간 또는 제후. 공자들 간의 세력 다툼으로 그야말로 혼돈의 시기였던 시대 인화(人和)의 가치로 전쟁의 승리를 추구했던 오기의 명언을 떠올려보며 자신을 다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