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놀듯이 살아봅시다.
장자는 내편과 외편 그리고 잡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자가 직접 썼다는 내편과 그의 후학과 추종자들이 쓴 외편 그리고 잡편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내편의 첫 장 제목이 소요유이다.
소요(逍遙)는 별다른 목적 없이 이리저리 어슬렁 거린다는 뜻이고, 유(遊) 놀 유자이다.
바로 이 제목에 장자의 사상이 오롯이 나타나 있다.
별다른 목적 없이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노는 삶. 그 삶이 장자가 살고자 했으며, 결국 살아냈고 또 인류 모두가 그렇게 삶을 유유자적하기를 바랐던 그였다.
나는 우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좀 구분 짓고 싶다.
노장(老壯) 사상해서 노자와 장자를 하나로 묶어 생각을 많이 하는데 자연(自然)의 도(道)를 인간사에 가져와 공통적으로 무위(無爲) 할 것을 주장한 것은 맞지만 노자와 장자의 무위는 사뭇 그 의미가 무척 다르다.
노자의 사상은 통치 사상 즉 정치적 무위(無爲) 주장한데 반하여 장자는 개인 삶의 철학이며 개인에게 무위(無爲) 할 것을 권하는 철저한 개인 철학이었다.
따라서 노자와 장자의 지향점이 완전히 달랐으므로 단순히 무위를 추구했다고 해서 그들을 같은 철학의 부류로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노자의 사상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이 블로그에 노자의 사상이 반영된 도덕경(道德經)의 내용도 포스팅했으니 오해 없으시길 바라며 노자와 장자 그 둘 사상의 지향점이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시 장자 내편 첫 장으로 돌아와서 소요유 편에는 그 유명한 새 이야기인 곤과 붕 이야기를 포함해서 모두 다섯 가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는 마지막 이야기인 혜시와 장자의 대화를 참으로 좋아한다.
소개하면 이렇다.
혜시가 장자에게 묻는다.
"나에겐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죽나무라 하니, 그 몸통은 울퉁불퉁하여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그 작은 가지들은 뒤틀리고 굽어서 그림쇠에 맞지 않소,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지금 당신의 말은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소. 뭇 사람들이 함께 버리는 바로다."
장자가 답하기를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쓸데가 없다고 탓하는군.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마을의 텅 빈 들판에 심어놓고, 그 곁을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저 왔다 갔다 하거나 그 아래 누워 뒹굴거리거나 하지 않는가? 그렇게 하면 도끼날에 찍혀 일찍 베어지는 일도 없고, 아무도 해를 끼치려 하지 않을 텐데, 쓸모없음이 무슨 근심거리나 되겠나?"
소요유(逍遙遊)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 모든 것을 어떤 목적에 맞추어 수단화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 가정, 학교, 사회, 직장, 국가는 각기의 목적에 맞추어 사람을 틀에 박아 만들려 내려고 한다.
부모는 자식이 입신양명(立身揚名) 하여 자신의 이름까지 높여주길 바라며 경제적으로도 자식의 덕을 보고자 한다.
학교는 명문학교 진학이나 어려운 국가 고시에 합격하여 학교의 명예나 명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직장에서는 훌륭한 사원이 되어 회사의 든든한 살림꾼이나 아이디어 뱅크 역할을 기대하며, 특히 국가는 한발 더 나아가 국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가차 없이 자유를 박탈하고 감옥으로 보내 사회와 격리시키니 혜자의 눈으로 바라본 비틀어진 큰 나무와 같이 우리 인간을 바라보고 재단하려 든다.
하지만 장자(莊子)는 이를 부정한다.
큰 나무는 인간에게 엄청난 위안과 삶의 활력을 주는 존재이다.
베어내고 재단하여 그 생명을 빼앗을 것이 아니라 같이 상생(相生) 하며 살아갈 존재인 것이다.
여름날 그늘 밑에서 그 나무가 뿜어 내는 신선한 산소를 마시는 즐거움을 어찌 장롱이나 지팡이로 쓰는 것과 비교하겠는가?
인간의 삶도 그렇다 무엇을 하려 또 이루려 애쓰며 상처받으며 고통 속에 살 필요가 있겠는가?
타고 난 대로 또 타고 난 능력껏 일하며 즐기면 그만인 것을 저것을 이루고자 내 것인 이것을 버리고 무시하지는 않는가?
장자 내편 소요유의 진정한 의미와 교훈을 깨닫고 자신을 크기만 하고 구부러져 아무 쓸모없다는 가죽나무처럼 여기며 애써 휜 것을 곧게 하려 힘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소요유의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할 것이다.
이것이 무위(無爲)를 위한 유위(有爲)라 생각하지 말고, 그저 본래의 나로 돌아간다는 회귀(回歸)로 여기며 부단히 무위(無爲)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