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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Jun 18. 2024

아서 밀러- 모두가 나의 아들(All My Sons)

독점자본주의 시대 인간의 민낯을 들춘작품 그럼 신자유주의인 지금은?

미국의 3대 극작가하면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그리고 오늘 소개할 아서 밀러가 꼽힌다.

유진 오닐은 테네시 윌리엄스나 아서 밀러보다 한세대 앞선 연장자로 이미 193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미국 문학 특히 희곡 분야에서는 선구자적 입지에 있다면 테네시 윌리엄스와 아서 밀러는 그런 토대 위에서 미국의 희곡.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 분야까지 두루 영향을 미치며 현재 미국의 문화가 전 세계 문화를 이끄는 현상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을 아닐 것이다.(말년 작품의 인기가 시들었던 테네시 윌리엄스와 달리 아서 밀러는 2005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대중적 인기 역시 시들지 않았었다.)


특히, 아서 밀러의 삶은 마릴린 먼로의 남편으로서도 대중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기도 했지만 1930년대 공산당 가입 이력으로 인해 1950년대 한국전쟁을 계기로 거세진 미국 내 반공주의 이른바 매카시즘의 피해자로 많은 논란과 고초를 겪은 바 있는 지금의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가십과 담론 그리고 문학적 영향력을 함께 몰고 다닌 뉴스메이커 그 자체의 삶을 살았다.(최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3회 수상에 빛나는 영국 출신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즈가 사위인 것은 관심조차 가지 않는 평범한 일 같다. 하긴 유진 오닐처럼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사위 찰리 채플린이었다면 모를까.)

다분히 미국적 아니 뉴욕커적 사진으로 와닿는 아서 밀러와 마릴린 먼로의 사진

우선 이 작품은 1947년 발표된 것으로 아서 밀러의 출세작으로 불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문학활동 초기 이 작품의 성공으로 안정적인 극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1930년대 미국 경제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목도(목도라기보다는 그 혹독한 시련을 10대 말부터 공장노동자 등으로 일하여 참담한 현실을 직접 몸소 체험했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한 후 공산당에 가입(앞서 소개한 대로 이러한 그의 이력은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에 희생양으로 고초를 겪게 된다) 하는 등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회의가 가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미국 문학계(희곡 중심)는 공산주의 진영의 문학적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사실주의 기법을 도입하여 자본주의 진영에서 자본주의사회의 부조리를 가감 없이 표현했는데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과히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작품의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20세기 초반 미국은 그야말로 거친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 대륙에 비하여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었으나 그 유럽 대륙에서 두 번의 세계대전은 미국을 자본주의 최상위 국가에 반열에 올려놓게 된다.

우선 산업 생산을 할 수 없었던 유럽 대신 그들과 정신적인 맥을 함께하는 미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군수용품과 생활 필수품의 세계 공장이 되었으며 아울러 공산주의의 대두 속에서 점차 이념 대립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급속한 산업화와 독점 자본주의의 발전 그리고 젊은이들의 전쟁 참전 등 그야말로 거친 풍파 속에 온 미국인들이 던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일어난 1929년의 경제 대공황도 미국인들에게 무르익어가던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낱낱이 보여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역사적 배경 속에 '모두가 나의 아들'의 모든 등장인물은 그야말로 내던져진 존재들이었다.

20세기 초 모든 인류는 역사의 회오리 속에 고통받았다. 그중 미국인들에게 가장 큰 시련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경제 대공황(左)와 진주만 공급(右)의 기록사진

극은 한여름 아침 여유와 평화가 깃든 1940년대 후반 미국의 비교적 부유한 집 정원에서 시작된다.

성공한 사업가 조 켈러 그리고 그의 사업체에서 이른바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그의 아들 크리스.

그리고 의사와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이웃들의 평범한 일상으로 시작되지만 어딘가 날이 선 모습들이다. 더욱이 전날 몰아친 거센 바람에 태평양전쟁에 전투기 조종사로 나서 3년째 실종 중인 그들의 둘째 아들 래리를 위해 심은 사과나무가 꺾어진 것에 대해 어머니인 케이트는 불안해하지만 아들이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는 아들 크리스가 초대한 과거 자신들의 이웃집에 살며 조 켈리와 동업자였던 스티브 디버의 딸인 앤이 와있었다. 사실 래리의 약혼녀였던 앤에 대하여 크리스 자신도 보병 장교(중대장)로 참전하여 많은 중대원들의 희생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괴로워하던 상황에서 편지를 나누며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이내 청혼을 하여 부모의 결혼 허락까지 얻기 위해 초대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크리스와 앤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결혼을 약속하게 되나 부모 특히, 작은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그 결혼을 인정하는 순간 작은 아들의 죽음 또한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이므로 둘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급기야 변호사인 앤의 오빠가 크리스와 앤의 결혼 소식을 감옥에 있는 스티브 디버에게 전하러 갔다가 흥분하여 조 켈러의 집으로 여동생 앤을 데리러 오겠다는 다급한 전화를 하고 극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사실 조 켈러와 스티브 디버 사이에는 과거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우방국들의 주력 전투기였던 P-40의 실린더를 공급했던 이들은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실린더의 금이 간 불량품이 생산된 것을 알았으나 항공대에 부품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경우 사업이 도산할 것을 우려한 조 켈러는 불량품의 폐기가 아닌 용접하여 납품할 것을 전화로 지시하고 정작 자신은 독감을 핑계로 회사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공급된 120여 개의 불량 실린더는 기계 결합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젊은 P-40 전투기의 조종사 21명이 추락사하게 된다.

이에 재판이 열리고 둘은 모두 유죄를 선고받지만 2심에서 조 켈러는 유선전화의 증거 증명 불가를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고 동업자인 스티브 디버만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유죄 판결을 받아 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있었던 것이다. 이후 조 켈러는 부유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지만 스티브 디버는 죄인이 된 영어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이에 실망한 그의 자녀인 조와 앤 남매는 아버지를 철저히 외면하지만 여동생의 결혼을 알리러 아버지의 교도소에서 면회한 아들 조는 아버지로부터 그간의 억울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고 앤을 데리고 뉴욕의 집으로 가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크리스와 앤은 결혼을 강행할 생각이었으나 모든 지난 과거가 파헤쳐 진 사태 속에서 결국 앤은 래리에게 받았던 마지막 편지를 공개하게 되는데, 그것은 래리가 아버지의 탐욕으로 인해 같은 처지의 젊은 조종사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던 사실에 괴로워하던 중 자살 비행에 나서기 전 자신의 그러한 심경을 써 보낸 편지로 래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족의 안위와 탐욕 속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이미 면죄부를 내렸던 자신들의 지난 죄에 대하여 다시금 각성하기 시작한다.

특히, 자신의 옆에 아버지가 있었다면 그의 죄를 단죄하기 위해 총으로 쏴 죽여버렸을 것이라는 내용이 적힌 부분을 읽는 장면에선 최고조의 긴장감 아니 그리스 비극의 비장미마저 흐른다.


이렇게 모든 것들이 낱낱이 드러난 순간 자리를 비운 조 켈러.

그리고 잠시 뒤 총소리 한 방이 들리며 그의 삶은 비극적 자살로 마무리된다.

그 후 남은 그의 가족과 디버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작가 아서 밀러는 글로 남기지 않았으며 희곡을 읽거나 감상하게 되는 개인에게 가치판단에 전적으로 극의 결말을 맡기며 막이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사건 전개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P-40 전투기의 2차 대전 당시의 모습

책의 줄거리에서 살펴보았듯 자본주의 사회가 정점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경제공황과 세계대전의 거친 파고는 인간의 윤리의식마저 파괴시켜버리고 오로지 욕망과 이기심의 끝없는 절벽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맹목적인 신념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최소한의 죄의식마저 강탈 당해버린 조 켈러 모습에서 작가 아서 밀러의 절규가 마음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1947년의 작품인 것을 감안했을 때 과연 우리는 그보다 몇 배는 악랄하게 진보했다는 자본주의사회 메커니즘이라고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속에 살면서 과연 윤리적으로 더욱 견고해졌을까? 아니면 더욱 추악한 욕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허우적거리고 있나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그때보다 더욱 암울해 보이는 현실에 좌절감마저 든다.


정말 현대사회에 윤리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그저 징벌적 형벌만 면한다면 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거대 기업과 자본 속에 숨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문법위에 군림하는 자본가들을 생각해 본다면 아서 밀러가 지어낸 이 인물들이 순수해 보이기까지 하니 어쩌면 우리 인류는 풍요 속에서 타락하는 길을 너무 멀리 와버려 순수의 길은 영원히 안녕을 고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아닌 재앙적인 확신에 이르게 됨을 느낀다.


수많은 혁신적인 기술과 AI 기술이 막 등장하고 아직 개념조차 익숙하지 않은 암호화 화폐가 만연하는 시대 다시금 예측하기 힘든 또 하나의 N 차 혁명으로 접어든 즈음 과연 신자유주의가 주창하는 진정한 자유주의 사회가 도래되었는지 아니면 그 이면에는 욕망의 나락에 허덕이는 우리 인류의 진정한 모습이 가려진 채 파멸을 향해 가고 있는지 80여 년 전에 독점 자본주의 시대의 지옥 같은 모습에 치를 떨던 아서 밀러의 통한의 마음에서 나은 희곡 작품이 오히려 아름다운 동화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과연 래리처럼 모두가 나의 형제임을 알고 아버지의 죄로 괴로워하다 자살하는 젊은이 그리고 그런 아들의 마음을 알고 모두가 나의 아들들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죽음으로 단죄하는 아버지..... 이건 차라리 사회 부조리 고발극이 아닌 아름다운 동화가 아닌가 싶다)


극 자체의 충격적 소재나 결말보다 그간의 인류 역사에서 현재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의 마르크스가 가장 중요한 사회 부조리로 지적했던 인간 소외 문제가 더욱 심화되어가는 작금의 현실에서 이 희곡이 섬득하게 다가오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거라는 무거운 생각에 사로잡히며 아서 밀러 1947년 문제작 '모두가 나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다.

민음사판 '모두가 나의 아들' 표지(左)와 아서 밀러(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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