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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Jun 27. 2024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우선 저자 톨스토이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러시아 문학을 넘어 문학 전체 이야기를 해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문학에 관심이 없는 이라도 말이다.

이토록 그는 인류 최고의 문학가이며 지성가이다.

당대 교류했던 사람들 또한 최고의 지성들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으로서 타고난 욕망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 그 욕망과 지성 사이의 현실적 괴리감에 괴로워해야 했던 약하디 약한 인간이었다.


그는 절제할 수 없었던 도박과 외도에 대한 욕망 그리고 그것이 옳지 못하는다는 윤리의식의 트라이앵글 사이에서 늘 괴로워했으며 결국 지천명이 넘어서는 종교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톨스토이의 이러한 개인적 욕망의 극복은 사실 나이가 들면서 노화라는 자연적 이유로 인해 극복되었다고 치더라도 그가 죽기 전까지 매달렸던 인류 전체의 비극적 현실 극복이라는 목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은 공허한 유토피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의 삶은 행복한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이루어진 성공에 권태를 느끼며 새로운 자극을 위해 쾌락적 행위에 몰두와 후회를 반복하다. 말년에 이르러 인류 전체의 행복을 사랑의 복음으로 전하고자 다시금 집필활동에 매진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톨스토이였기에 아직도 욕망으로 괴로워하고 파멸하는 우리 현대 인간사에 그의 작품의 울림이 깊게 자리한지도 모르겠다.(하이데거, 사르트르 등 많은 현대철학자들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가장 긴요한 답을 준 문학가가 바로 레프 톨스토이이기도 하다)

오늘은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톨스토이의 대표적인 중단편 소설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감상해 보자.

젊은 시절의 레프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소설은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등의 그의 창작 초기의 장편소설을 내놓아 문단의 엄청난 평가를 받던 때를 지나 러시아 정교회 등 사회비판 운동을 했던 시간 속에서 회심(回心)이라고 하는 주로 농민계층 등 열악한 사회계층을 위한 쉽고 우화적인 단편소설을 창작을 했던 시기 그리고 만년의 역작이라고 하는 장편소설 '부활'을 집필했던 시기까지 굳이 나누고자 한다면 세시기의 작품 활동 기간이 있었다.

특히, 회심의 시기 자신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작품을 부정하며 진정으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창작에 열을 올리던 때였다.


오늘 소개할 '이반 일리치의 죽음'역시 이 시기에 쓴 중단편 소설로 비교적 쉬운 언어로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줄 수 있도록 기획한 작품이다.

그럼 간단하게 줄거리를 살펴보자.


이야기의 시작은 검사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대하는 동료들의 일상에서 시작된다.

가까운 동료 검사 이반 일리치가 죽었지만 모두들 그의 죽음에 대하여 그저 타인의 죽음일 뿐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인 양 받아들인다.

심지어 고위직이었던 이반 일리치가 죽음으로 자신들이 그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오르는 승진과 급여 인상에 더 큰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그의 추도식에 참석하여 이를 빨리 마치고 카드놀이를 할 생각만을 궁리한다. 한마디로 타인의 죽음은 그저 타인의 죽음일 뿐이며 나의 죽음은 그와 무관하고 현재도 미래도 나는 살아있는 존재로 여기며 그들의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인간은 누구나 죽기에 타인의 죽음은 나의 죽음과 같은 현상으로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여정의 끝임을 각성해야 하는 사태임에도 우리 모두는 무의적이든 의식적이든 이에 대하여 생기<生起>하기를 회피하며 마치 영생의 존재인 듯 비본래적으로 살아간다-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적 사유 )

그러고 나서 이반 일리치의 삶의 얘기로 전개된다.

고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승승장구하는 삶을 산 '이반 일리치'.

귀족 출신의 아름답고 교양 있는 아내를 맞이하여 1남 1녀를 두고 있다.

진급에 있어 약간의 부침이 있었지만 러시아 혁명의 시기 비교적 관운도 타고나서 예심판사를 거쳐 검사에 이르기까지 순탄한 삶을 살았다.

특히, 검사로 승진을 하면서 집을 사고 당시 부유층이 집안에 가구와 골동품으로 꾸밀 때는 삶의 최고의 행복이라고 칭할 만할 자부심과 우월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삶의 전환점이 되는 일이 발생하는 데 책장을 정리하던 중 사다리에서 떨어진 일이 일어났다. 잘 대처해서 별일 아닌 일이라고 부인에게 자랑까지 했으나 그 후 점점 옆구리 쪽에 거북함과 통증 그리고 입안의 역겨움 냄새가 오장육부로부터 올라오는 일이 생겼다.


차츰 몸의 상태가 안 좋아지더니 이제는 용하다는 의사뿐만 아니라 기(氣) 치료를 하는 종교인까지 만나고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가 이내는 직장에도 못 나가고 몸 져 눕게 된다.

이렇게 죽음과 대면하게 된 이반 일리치.

이런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그간 행복의 제일 조건이라 여겼던 일들이 사실은 별반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며 그렇게 과거로 과거로 돌아가 생각해 보니 유년 시절의 아무 조건 없이 다가왔던 삶에 대한 경이 그 차제가 행복이요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기만으로 물들었던 자신과 가족 그리고 동료들의 삶에 염증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옆에서 온 마음을 다하여 병수발을 들어주는 농민 집사 게라심에 위로와 존경을 느끼고 자신의 죽음 이후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될 가족을 생각하니 그간 미움의 감정이 더 컸던 부인과 딸 그리고 아들에 대한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병은 점점 악화일로를 겪게 되고 이제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자신에게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더 이상 회피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닌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그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이내 사라지고 평온한 상태에서 임종을 맞이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사실 이 책을 읽음에 있어 줄거리 파악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톨스토이의 집필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답은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 속에 이미 다 기술해 놓았다. 그 책에서 서론에서 결론으로 이어지는 답이 이반 일리치가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1927년  '존재와 시간'을 발표하여 현대 문명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하여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일대의 사건, 한마디로 현대인의 의식구조 자체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이 가능하도록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이 바로 레반 톨스토이가 1886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발표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책의 줄거리 파악보다는 주인공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와 그로 인해 변하게 되는 삶의 태도가 이 고전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교훈인 것이다.(사실 이반 일리치의 변화라기보다는 톨스토이의 생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 그 중요한 일에 대하여 간략하게 하이데거의 관점으로 이야기해 보고 마무리 지어보고자 한다.


인간존재는 실존적(세계에 아무 이유 없이 내던져진 존재)이라는 것과 본래적 존재가 되기 위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의 책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단순히 나라는 단독자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인간은 무수히 많은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세계에 관계하며 존재하며 그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현존재'라 칭하며 우리가 이렇게 많은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세계에 아무 이유 없이 내던져진 존재이기에 '세계-내-존재'라 말했다. 이유 없이 우연으로 존재하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실존적 존재)인 우리는 우리 스스로 존재에 대하여 여러 물음을 제기할 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 우리는 언제, 어떻게 우리 존재에 대하여 물음을 제기할까? 그건 이유 없이 불현듯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느낄 때이다. 그럼 그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불안은 우리의 실존이 죽음으로 마무리된다는 그 필연적 종말에 대한 감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불안의 감정을 회피하기 위해 세간적 가치에 집착하며 그런 존재를 비본래적 존재라 하는데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본래적 존재가 느끼는 불안의 감정 대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세간적 가치가 방해될 만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고 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리하에 이반 일리치의 그 치열했던 삶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반 일리치도 거의 모든 사람들과 같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전까지 세간적 가치를 욕망하며 비본래적으로 존재하였으나 그런 가치는 죽음에 대한 불안에 대하여 가장 비열한 자기 기만이었음을 알고 인간 실존에서의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나서 자신의 행복과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금 알게 되었고 그의 마지막 삶의 순간은 만족과 사랑으로 충만한 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톨스토이와 하이데거가 정리한 삶에 대한 엄청난 영감을 다시금 생각해 보건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진정으로 충만한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를 받은 우리는 그 자체로 축복받은 것이며 타인이 욕망하는 세간적 가치보다 진정으로 삶을 경이롭게 여기고 타인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하여도 감사의 마음 또한 자연스레 가져야 할 것이다.


아마도 노년의 톨스토이도 쉬운 언어와 스토리로 이렇게 큰 가치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톨스토이가 인용하는 구절이 있는데 독일의 철학자가 3단 논법으로 제시한 명제인데 자신의 죽음을 타인의 일로 저 멀리 유기하지 말로 언젠간 닥칠 나의 일로 여기며 삶의 순간순간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충만과 사랑으로 가득한 우리 유한한 삶의 축제를 마음껏 즐기라는 의미의 명언 한 구절을 남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는 죽는다.

요한 고트프리트 키제베터  '이반 일리치의 죽음' 中

레프 톨스토이(1828. 9. 9.~1910.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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