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실존주의 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하면 인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을 인식하며 고통받는가 하는 메커니즘을 밝히는데 주안점을 주었으며 그 부분에 있어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나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특히,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의 존재와 어떻게 고통받는지 또 무엇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비록 많은 사람의 쉬운 이해를 통해서는 아니지만 지금을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이에 가장 큰 영향하에(마르틴 하이데거는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고 샤르트르가 자신의 철학을 정확히 이해했다는 데 대하여도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켰으며 자신의 철학이 실존주의 카테고리 안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하기도 했다) 있는 철학가이자 문학가로 유명한 장 폴 샤르트르의 짧지만 강렬한 희곡 작품 '닫힌 방'을 감상해 보고자 한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신문기자이자 문인으로 활동했던 반전운동가 가르생. 파리에서 우체국 직원이었던 이네스 그리고 집안이 어려워 나이 많은 남자가 결혼하여 집안을 건사하였던 에스텔은 각기 다른 이유로 죽어 지옥에 끌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기존에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나온 지옥과는 사뭇 달랐으니 유황불, 장작불, 석쇠 등으로 사람의 몸을 찢고 불태우는 그런 지옥이 아니라 밀폐된 공간 속에 서로 모르는 타인 셋을 가두어 버린 것이다.
그저 가두었기만 했을 뿐 아무 위해도 가하지 않는 이런 곳이 지옥이었다.
급사의 안내로는 그저 이 세 사람이 한 공간에서 그 어떤 유물적 관여 없이 그저 서로에게만 그 모습이 보이는 영혼의 존재로 존재하며 아울러 그들은 그들을 기억하고 말하는 이승의 세계를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으며 그들 서로만이 대화할 수 있었으므로 가르생은 조용히 서로의 존재에 대하여 인정하고 그저 말없이 지낸다면 의외로 지옥 생활을 잘 버텨내고 구원받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은 이들을 기억하는 이승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대화와 살아생전 가지고 있던 성적(性的-이성애와 동성애 취향이 섞여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취향으로 서로를 가만히 두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내 이승의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며 오로지 죽은 영혼들끼리 서로의 취향과 인정을 위해 악전고투를 하는 상황에서 가르생은 이내 깨닫게 된다.
인간 존재의 고통은 타인의 존재로 인한 욕망의 비실현성으로 인한 고통이었음을 그리고 그 모든 욕망을 놓지 않을 경우 영원히 그 고통의 쳇바퀴 속에서 지옥의 고통을 안고 괴로워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다분히 불교의 세계관을 가지고 우리 삶의 고통과 해탈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느낌이 드는데 사실 마르틴 하이데거가 불교사상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비교적 짧은 희곡은 마지막 부분의 희대의 명대사를 남기고 끝을 맺는데 다음과 같다.
희곡은 나에게 많은 각성을 남기고 끝을 맺는데 실존주의나 조금 더 나아가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명언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개념까지 넓혀도 소위 말하는 부르주아 철학의 한계가 명확히 느껴졌을 뿐이다.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며 자본의 인간소외 현상을 극으로 치닫고 있는 현대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한가운데 살면서 그저 실현할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욕망을 위해 살기보단 죽음이라는 시간적, 물리적 한계가 명확한 존재이니 만큼 오롯이 자신의 내면을 바로 보며 한편으론 이타적 존재가 될 수 있는 인간이 되라고 외쳐 되는 이 부르주아 철학에서 어떤 위로와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이보다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치우침 없는 부(富)의 분배를 주장하며 타인의 욕망 자체를 부정하여 모두가 큰 철학적 각성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그런 철학이 낫지 않았을까?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처처럼 해탈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엄청난 철학적 각성이 필요했을까?
또한 철학에 관심 없는 자라면 그저 타인을 부러워하고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지금의 SNS에 여러 조작된 거짓 삶의 모습을 사진 찍어 올리기 위해 모진 노동을 감수하며 조금 더 나은 것, 조금 더 나은 곳, 조금 더 나은 무엇을 위해 오늘도 조장되어 결코 이룰 수 없는 욕망을 향해 자신을 내몰고 있는 것은 어쩌면 개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강요된 현실이 아닌가 하는 좌절 또한 느끼게 된다.
세 주인공이 지옥의 모습에 너무도 안도하며 요즘 말로 말랑하게 생각했지만 서로를 물어뜯으며 결국 지옥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 장 폴 샤르트르의 '갇힌 방' 감상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앞에 넋두리에도 불구하고 장 풀 샤르트르 자신도 공산주의 국가에서 기존과는 다른 대안을 모색했으나 그들도 결국 폭력으로 계급 지어진 또 다른 전체주의였음을 통감하며 뒤돌아섰던 사실도 적어보며 과연 인간이 어떻게 고통받고 또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해탈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뫼비우스의 띠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하며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