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에 이 책이 국내에 출판될 때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제목 번역으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생각만큼 인기를 끌지 못하자 엉뚱하게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고, 그 후 10년 넘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가운데 현재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다시금 그 제목을 찾은 작품인 '노르웨이의 숲'을 소개하고자 한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 1월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따로 소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많은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고 그의 에세이 또한 많은 판매량을 보였는데 그중에 몇 편을 읽은 사람이 지금 글을 쓰는 본인이기도 하다.
마라톤과 와인. 위스키 그리고 재즈음악을 사랑하는 딜레탕트 한 삶을 살고 있는데, 이는 나중에도 이야기하겠지만 무언가 부르주아 느낌이 물씬 풍기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그의 에세이와 이번에 소개할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며 느낀바이다.
아무튼 워낙 유명하고 해마다 노벨문학상 발표 시기가 되면 어김없이 유력한 수상자로 거론되기에 작가에 대한 소개는 이쯤으로 하겠다.
이십 년 전 읽었던 상실의 시대 책표지(左)와 근래 민음사에서 제작한 노르웨이의 숲(右). 본인은 두 책 모두 소장하고 또 읽은 사람이 되시겠다.
우선 책의 내용을 살피 보기 전에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69년부터 197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좀 알고 가야 작품을 더 알차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1968년의 유럽은 소위 말하는 '68혁명'으로 뜨겁게 달구어졌던 시기이다.
세계 1.2차 대전을 겪고 서양의 지식인들은 지난 근대를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 발단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 미국으로 갔던 유대인 출신 철학가들의 분석으로 시작되었다. 이른바 '비판철학'불리며 이내 '프랑크푸르트학파'라는 하나의 철학 사조를 만들었다. 이들 중 대표적으로는 테오도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그들의 주장을 비판하며 조금 더 현실성 있는 이론을 만든 위르겐 하버마스 등이 있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고가 몰아치던 당시 자본주의 사회와 그간의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과 홀로코스트 등을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했던 철학자들이었다.
이런 철학적 반성과 새로운 사상의 영향하에 유럽에서 기존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적 사회변혁하고자 했던 것이 '68혁명'이었다. 기본적으로 좌파적 성향으로 인해 우리나라에는 덜 알려져 있지만 현대 사회주의적 유럽의 국가정책을 고려한다면 그 영향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기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비판적 여론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히피'운동이 일어났고 이런 히피 문화가 유럽의 68혁명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되고 있다.
이 시기 일본도 이런 유럽과 미국의 영향받아 사회문제에 대한 좌파적 변화를 꿈꾸었던 학생운동이 활발했고 노르웨이의 숲 주인공인 와타나베처럼 미국적 감성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이른바 '도쿄대 사건'으로 회자되는 68년과 69년의 학생운동으로 인해 도쿄대에 69학번이 없을 정도로 책에도 나오듯이 대학 연대 수업 거부가 만연했던 시기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음식 유튜브 채널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당시(1972년) 아사마산장사건이라는 극좌파에 의한 인질극 사건이 있었을 정도라는데 정작 일본인들은 그 사건 자체보다 당시 겨울이었던 시기 경찰들이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김이 모락모락 피는 컵라면을 먹는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개발 당시 별 관심을 끌지 못했던 컵라면이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했는데 당시 일본도 이처럼 좌파 성향의 학생운동이 68혁명의 영향으로 폭력적 성향으로 크게 벌어지고 있던 시기라고 한다.
1968년 동경대 사건이라고 말하는 좌파 학생운동의 격렬했던 시위 모습 '노르웨이의 숲'의 대표 시대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위 내용을 근거로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89년 11월 독일의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는 승객이 짐을 정리하고 하차하는 순간 배경음악을 틀어놓는데 그때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이 나오게 된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와타나베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마들렌을 먹으며 지난 모든 추억을 회상하듯 그 음악을 들으며 십 대 후반에서 성년이 되는 스무 살까지의 삶의 여정을 떠올리게 된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와타나베는 공부를 그리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교성이 좋아 많은 친구가 있는 그런 성격도 아닌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그런 그도 절친이 있는데 그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 출신의 기즈키이다. 기즈키는 나오코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와타나베는 셋이 함께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나오코와도 친구 사이가 된다.
18살의 어느 날 당구를 치고 헤어졌던 기즈키가 다음날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에 싸이게 된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19살이 된 와타나베는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그 충격의 영향으로 졸업생 중 아무도 진학하지 않은 도쿄의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게 된다.
그렇게 기숙사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나오코를 만나게 되고 둘은 기즈키를 잃은 슬픔을 함께 공유하는 처지인지라 급격하게 친해지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이미 다섯 살 터울의 언니가 유년 시절 자살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지라 나오코는 연인을 잃은 슬픔과 지난 트라우마로 인해 정상적은 삶을 살기가 힘들어져 고베의 정신요양원으로 스스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나오코를 사랑하며 그녀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며 함께 하기를 고대한다.
와타나베는 기즈키가 죽었을 당시 어떻게든 살아가기를 결심했던 터라 도쿄에서 대학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그런 와중 미도리라는 같은 대학 1년 후배를 만나게 되고 둘은 급격하게 친해지게 된다. 서로가 애인이 있는 사이인지라 친구 이상은 아니었으나 2년 전 엄마를 잃고 같은 병으로 투병하는 아빠의 간병을 하는 미도리는 힘든 생활을 하는 와중에 무엇이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는 와타나베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되고 이내 함께 사귈 것을 제안하지만 나오코를 기다리는 입장에서 그 마음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와중에도 나오코의 요양원을 두 번이나 방문하며 만나는데 요양원 룸메이트인 레이코 씨와도 친분을 쌓는데 과거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였던 그녀의 음악적 취향에 와타나베도 공감하게 된다.
그렇게 대학 생활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나오코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낼 즈음. 갑작스러운 나오코의 자살 소식을 접하게 되고 방황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와타나베는 살아가기로 결심한 만큼 다시금 대학 생활로 돌아가게 되고 레이코 씨의 방문으로 그들만의 나오코의 장례식을 치르고 삶에 대한 새로운 용기를 얻으며 소설은 마무리된다.(미도리와의 관계는 이도 저도 지금 말로 'ing'로 결론 내지 않는다. 물론 회상 신에서도 언급이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십여 년 전 멋모르고 읽었던 당시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지적처럼 와타나베 이외의 사람들의 전후 사정없는 갑작스러운 자살과 주변 인물들의 죽음 그리고 청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성애(性愛)적 표현이 난무하는 억측의 소설로 느껴졌다. 다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J.D 셀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등을 호기심에서 연달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더 크다.
하지만 나이가 먹어 다시 읽어보니 1980년대 말 쓰인 작품으로 본다면 다분히 부르주아 철학의 영향하에서 작품이 쓰였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부르주아 철학이라는 특별한 사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현실참여적 철학과는 달리 인간의 실존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통한 개인의 자유 또는 삶의 평온 유지라는 지향점을 갖는다는 개인적인 사견이다. 이러한 느낌을 받은 계기는 인간 실존의 한계라는 '죽음'에 대한 각성이 작품의 전편에 폭넓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소설 '노르웨이의 숲' 中
어떻게 보면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철학처럼 모든 것이 양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한다는 입장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소설의 내용상 그것보다는 죽음이라는 인간 삶의 한계에 대한 각성을 요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비본래적 존재가 죽음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통해 본래적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개시의 전환점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주인공들의 대화에서는 당시의 좌파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혁명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기껏해야 주먹밥에 들어간 것이 연어이냐 매실장아찌냐를 놓고 푸념하며 도시락을 싸온 사람에게 면박을 준다는 등 학생연대 파업으로 학교가 임시 폐교되는 상황에서도 주인공 와타나베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렇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초현실적인 표현과 장면이 많음에도 그것이 가장 조금 나오고 현실에 대해 가장 충실한 소설이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에서 주인공들이 서로를 가지게 되었다는 독백과 나오코의 자살 이후 방황하는 와타나베가 영혼과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는 다분히 관념적 표현이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물론 소설이 공산주의 문학사조라 할 수 있는 사실주의적으로 흘러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을 배제해야 하는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정리하자면 이 소설은 인간 실존에서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죽음의 각성을 통해 느끼게 되는 고독. 외로움. 두려움 등을 인간적 공감과 연대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와타나베라는 인간의 서사를 통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다분히 부르주아 지향적인 관점에서 이 소설을 썼고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자신의 취미를 세계에서 가장 적절한 곳에서 딜레탕트한 삶을 누리는 것이 조금 더 와닿았다.
이런 무라카미의 관점과 삶을 비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인간은 주어진 삶에 대해 다분히 개인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관점에서는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런 부르주아적 성향이 노벨문학상의 심사위원이 후한 평가를 내린다는 일련의 소문을 그가 해마다 그 시기에 자주 거론되는 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상실의 시대'를 읽은 것이 아니라 새롭게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것 같은 느낌으로 이십여만 만에 읽은 책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글을 이렇게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