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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Oct 07. 2024

호밀밭의 파수꾼(줄거리 및 해석)- JD 샐린저

JD 샐린저가 1951년 이 작품을 발표했을 때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소재와 언어 사용으로 미국 내 몇몇 주(州)와 종교단체 그리고 학교에서 금서(禁書)로 지정할 정도로 많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현재까지도 그 작품성이나 집필 의도, 단어 사용에 있어서 논란이 많은 문제작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선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1919년 1월 1일에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자전적 소설이라는 평은 없지만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삶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은 것이 작가 샐린저 삶이라고 할 수 있다.(홀든이 책에서 꿈꾸는 현실적인 삶이라는 것이 한적한 시골에 외딴 오두막을 짓고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살고 싶었듯이 그도 은둔의 작가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또한 그의 책에 그의 사진이나 작품 해설 등이 담기지 않고 오롯이 소설 내용만 실린 것도 그런 그의 삶의 태도에 의하여 요구된 것이라고 한다.)


폴란드계 유대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 출신으로 고등학교 때 성적이 나빠 퇴학당했다가 홀든의 아버지가 4번째 고등학교 퇴학을 알면 보낼 것이라고 하던 군사학교를 졸업했다.

1936년 뉴욕대학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 만에 제적당하고, 1938년 가을에는 어시너스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역시나 같은 이유로 같은 학기만에 제적당했다고 한다. 그 후 맨해튼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의 문예 창작 수업을 청강하며 만족감을 느꼈는데 이것이 현재 우리가 아는 작가 JD 샐린저의 탄생을 알리는 시발점과도 같은 일이었다. 1951년 '호밀밭의 파수꾼'을 발표하고 예상치 못한(?) 성공에 적잖이 당황해했다고 하며, 1965년 마지막 작품을 발표함과 동시에 그를 더 이상 공식 석상에선 볼 수 없었고 자신이 살던 곳의 개신교회에 다니며 그들과 교류하다 2010년 1월 27일 조용히 노환으로 별세한다.

노년의 JD 샐린저

그럼 오늘 소객 할 작품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작품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열여섯 살의 소년 홀든 콜필드는 트랩(보딩) 스쿨이라고 하는 명문 기숙 사립학교를 다니는 부유층의 자제인데 벌써 세 번의 퇴학을 당하고 네 번째 학교인 펜시 기숙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가족과 학교 관계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번에도 영어를 제외한 나머지 네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고 12월 24일 크리스마스에 맞이하는 겨울방학과 동시에 퇴학 조치를 통고 받았다.

그가 학교에서 낙제점을 받는 이유는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며 공부를 안 해서는 더더욱 아니며 다만 학교라는 제도와 구성원들의 위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소위 말하는 선생님 말 잘 듣는 학생이 아니기에 반복되는 일이었다. 그저 위선자인 주위의 사람들을 증오하며 백혈병으로 죽은 동생인 앨리와 아직 초등학생인 막내 여동생 피비의 순수한 세계만을 동경하며 살아가는 변명과 불만으로 얼룩진 루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기숙사에 머물던 중 룸메이트인 스트라드레이터와 다툼이 생기고 물씬 두들겨 맞은 토요일 밤 그는 집으로 돌아가게 될 수요일까지 사흘 정도 뉴욕 맨해튼의 호텔에 머물 요량으로 짐을 싸 들고나오게 된다. 기숙학교를 나와 거친 바다와도 같은 뉴욕의 한가운데서 옛 친구. 학교 동료. 선생 등을 찾아다니며 외로움을 견뎌내려 하지만 그가 맞이하는 세상은 변태. 사기꾼. 창녀. 위선적인 부유층의 자제나 선생뿐이었다. 그런 와중 부모님 몰래 집으로 돌아가 여동생 피비를 만나게 되는데 아직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세계관 내에 있는 피비와 반나절 동행을 통해 미국 서부로 완전한 가출의 마음을 접고 다시금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소설은 그 후 반년 정도가 지나 요양원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른 홀든이 9월엔 다섯 번째 학교 입학을 앞에 두고 지난 이야기들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1950년대 미국 뉴욕의 모습. 책에도 등장하는 라디오 시티 앞 광장에서 피겨스케이트 공연을 하는 모습(左)와 1980년대 종로거리를 연상시키는 뉴욕의 거리(右)

지금도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역시 명불허전으로 성장기 획일화된 교육에 반항하며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무던히 애쓰는 투사 홀든. 아니면 부유층 자제의 그저 삼 일간의 뉴욕 생활 도전기가 모 그리 대단하다고 전 세계 6,500만 부 판매고를 기록하냐는 혹평의 부류로 그 반응에 있어 호불호가 명확한 작품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 책을 읽은 나의 반응도 후자에 가까웠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내가 읽어도 전혀 모자람이 없을 정도의 삶을 살고 있는 1950년대 초반의 극부유층 자제가 겪는 삼 일간의 객기 부림이 무엇이 그리도 대단할까? 소설을 읽는 내내 무언가 있겠지 있겠지 하며 어이없는 독백으로 마무리하는 홀든의 모습에서 '그래 너도 부유층이니깐 그 위선의 세계에서 안락을 구하는 그런 세속적 사람으로 변모해가는구나'하는 한탄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1906년 독일의 평범한 가정 출신의 똑똑한 소년의 처절한 성장소설이라면, 1.2차 세계대전을 겪고 세상 모든 부(副)를 가져간 1950년 세계의 경제수도 뉴욕 최상류층 응석받이의 방황기 성장소설뿐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소설로 받아들 일 수밖에 없었다.

'홀든 콜필드도 보딩학교를 졸업하고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잡고 살다 부모님의 재산을 물려받고 그의 자식을 다시금 연간 학비가 몇만 달러에 달하는 사립기숙학교에 보내고 역시 연간 등록금이

십만 달러가 넘는 명문 사립대학에 보내겠지. 그렇게 콜필드 가문은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사는 위선적인 부유층이 되는 과정에서의 성장소설이구나' 근데 모가 그리 대단하다는 걸까? 존 레넌이나 케네디. 레이건 대통령의 암살범이 그렇게나 곁에 두고 읽었서일까? 아니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변변치 않은 영어실력으로 번역을 하고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에서 찬양에 가까운 호평을 해서인가? 아무튼 대중들에게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화제성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소설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것이 아직도 전 세계 판매량 7,000만 부를 향해 힘찬 노짓을 하고 있는 원동력인가 싶었다.


아울러 워낙 자신의 일이나 작품에 대하여 타인의 평을 받는 것에 대하여 극도로 꺼렸던 탓에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소설에 대하여 작가의 평이나 집필 의도 등에 대하여 살아생전 남긴 코멘트가 없기에 오로지 읽는 사람들의 자의적으로 해석뿐인 작품에 대한 평이 신비적으로 가면서 어쩔 수 없이 생긴 현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가 점점 더 세속화되어가던 시대 당시 유행하던 '냉소주의적 입장'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했다는 생각도 작품을 읽는 내내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떠올랐다.


그저 순수한 어린아이들의 세계를 동경해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일생의 소원이라는 16살 홀든의 세계관에 감동받기에는 누구나 느끼겠지만 사실 무언가가 많이 빈 공허감이 먼저 오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이 수수께끼 같은 소설을 과연 무엇에서 감동받을 수 있나에 대하여 생각하며 읽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재미라는데 나름의 결론을 내리며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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