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대기업에 15년을 근무했다.
부푼 꿈과 나만의 거대한 이상을 가지고 신사업을 하는 곳으로 이직한 지 1년 6개월.
갈아 넣고 갈아 넣어서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했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대기업의 연말도 역시 뒤숭숭하다. 다양한 레퍼토리가 퍼져 나가며 누가 내 팀장이 될지, 누가 어느 팀으로 갈지 소문이 무성하다. 그때만 해도 집에 갈 연차는 아니었기에, 그 많은 소문의 소용돌이 안에서도 크게 휩쓸리지 않았다. 매년 최다의 인사 변경이라고 해도, 대기업의 특성상 새해가 되고 한 달이 지나면 다들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고, 그렇게 일을 해왔다. 늘 그랬기에 올해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새로운 조직은 대기업에서 하는 신사업이다. 신사업으로 보면 스타트업이지만, 대기업으로 보면 대기업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경영진은 갈아 넣게 만들 때는 스타트업이라고 쪼아대고, 뭔가에 대한 요구에 반응할 때는 대기업인 양 여러 가지 이유를 대거나 다른 방식으로 명쾌한 답변을 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첫해는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갔다. 새로 온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조직이라고 갖춰진 인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는 전혀 달랐다. 수장이 바뀌면서 소문 하나 없었던 조직개편 하나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되었다. 물론 종전 수장 밑에서 분위기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업의 특성상 일종의 목표를 이루고 난 후에 복구나 정리가 안되고,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해놓은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으리라. 시스템이 아닌 사람이 업무를 돌리다 보니 갈아 넣은 것을 채우기도 전에 쏟아지는 업무로 많이 지쳐 있었던 터였다. 그렇게 온몸으로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단 1~2년 사이에 집에 가야 하는 것을 고민하는 자리에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성공이라고 하기엔 내가 너무 아팠다.
집에 가는 것이 두렵지는 않다. 원 없이 일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기에 미련도 없고, 아쉬움도 없다. 다만, 내부적으로 뭔가의 오해들이 쌓여 심적 거리가 생기면서 실무의 총책임자인 내가 희생양처럼 되어가는 것이 짜증 날 뿐이다.
고민했다. 내가 정말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착각했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깨달은 것은 '그들의 축소 기작'에 내가 말려 들어가 있었던 것뿐. 성과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발목을 잡아 끄는 그 늪에 내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심리상담 선생님께 여쭈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어찌할까냐고... 선생님의 대답은 늘 그렇듯 예/아니오가 아니다. 프레임을 바꾸게 한다.
선생님이 제기한 명제는 "자존심이냐?", "자존감이냐?"였다.
옵션 1) 누가누가 뭐래서, 내가 이러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내가 생각한 대로 못해서 억울하고, 어쩌고저쩌고... 자존심이 다쳤어요. 상처 받았다고 하소연하고 있네요.
옵션 2) 다 알겠어요. 제가 눈만 감고 감내할 수도 있어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것을 선택하겠어요!! 자존감을 지키고 싶네요. 쿨한 척이 아니라 쿨해지네요.
저 둘 사이에서 나는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억울하고 누구누구 때문에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쭈굴 하게 사라지고 싶지는 않아서 최대한 버텨보겠다거나 또는 더 이상 마음이 동하지 않으므로 깔끔하게 정리했겠다거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밖이는 이 마음의 소용돌이...
그 소용돌이 속에서 "자존감"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억울함이 적고, 건강한 정신상태를 얻을 수 있다고.
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자존감"을 고수하고자 이렇게 글로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잠깐! 더 근본적인 것이 있었다. 자존감과 자존감을 논하기 전에, '내가 누군지' 명확하게 아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한없이 높이 올라가고 싶었다. 그래서 갈아 넣었고, 맞는 길을 가는 듯했다. 그런데 스트레스에 취약한 나를 발견했고, 다른 이들의 비판을 생산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면 다 받아낼 수 있는 일들도 끝없이 조여대는 조직의 생리 앞에서 무너지기 바쁘게 속수무책이었다.
스트레스 컨트롤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왜 위로만 올라가려고만 했을까? 혹자는 욕심 때문이라고 한다. 자주 내려놓는다고 하면서도 욕심 거리가 생기면 눈이 돌아가나 보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일단 저장하고 보는 본능들이 욕심의 한 모습인가 보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뇌혈관이 터질 것 같은 나를 바라보며, 더 이상 신선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나를 자학하고 있다면, 이제 스트레스에 취약한 나를 인정해야 할 듯하다. 그동안은 거기까지 못 가봤으므로 몰랐으니까 그런가 보다 했지만, 끝간 곳에서 만난 나는 사뭇 낯설었지만 그 모습도 내 모습이므로 이제 이쯤에서 인정해 주고 싶다. 그리고 그동안 애썼다고, 갈아 넣어서 뭔가를 하느라고 고생했다고 나 스스로를 이제는 좀 챙겨주고 싶어졌다. 이제 겨우 40년 남짓 왔는데, 최소한 앞으로 온만큼 이상으로 더 가야 하는데, 자존심만 세우다가 나 스스로가 사라져 버려 자존감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선택할 것이다. 내가 좀 더 행복한 방향으로. 고로 좀 더 지나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더라도, 자존감을 선택한 이 선택이 자존심을 선택한 다른 선택지보다 조금은 덜 후회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도닥여 주고 싶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좀 주며, 조직 안에서 끝없이 올라가고자 하는 비이성을 버리고, 조금은 덜 가져도 행복한 나를 선택하고 살아가자고 다짐한다. 고로 나는 자존감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