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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을 요리하다 Feb 12. 2024

우울과 의욕은 종이 한 장 차이 (부제:3주간의 감기)


 친구네 집에서 포항 직송 과메기에 소주까지 한 잔 기분 좋게 걸친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편두통은 심했지만, 약간의 취기 덕에 그래도 기분은 그럭저럭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대충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눈 뜨면서 직감했다. "감기다. 망했다." 


 그래도 나름 요리 인플루언서라고, 집에서 건강한 재료로 만든 식사를 뚝딱뚝딱 하루 두세 끼씩 잘 챙겨 먹어온 세월이 몇 년인데. 게다가 (지금은 그만둔) 테니스도 쳤었고 필라테스도 열심히 다니며 일구어 둔 기초체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름 건강한 생활을 시작하고선 달고 살던 감기도 일 년에 한두 번 올까 말까였으니까. 근데 온몸으로 딱 느꼈다. "이거 그 때 그 느낌인데?"


 쿨룩쿨룩 목을 긁듯 연신 터져 나오는 기침에 코로나부터 의심했지만 자가키트를 몇 번이나 해봐도 코로나는 아니었다. 지나가는 목감기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커피도 마셨고 맥주도 마셨다(과거의 나 미안..). 온수매트 정도로 원만히 합의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꼬박 3주를 아팠다. 기침감기로 시작해 고열을 거쳐 코감기로 마무리된 고난의 여정이었달까..




(고양이와 책, 그리고 당연히 무엇보다 스마트폰이 없었으면 3주의 병상 신세를 버틸 재간이 없었을 거다)








 돌이켜 보면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반년 전, 나는 인테리어 플랫폼에서 패션 플랫폼으로 이직을 했다. 실무만 잘 해내면 되는 시니어에서 팀 매니징을 해야 하는 팀리더로 역할도 바뀌었다. '어디서 뭘 잘 못하는 내 모습'을 가장 못 참는 ESTJ로서, 빠르게 적응하고 성과를 내는 게 인생의 최우선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 회사랑 똑같이 (혹은 더 적게) 야근을 해도 훨씬 더 피곤했고, 더 예민했다. 근데 문제는, 그러면서 나 자신을 보살피는 게 후순위로 내려갔다는 거지.


대충 이런 삶이었다 :

 야근을 핑계로 남편이 권했던 아침 유산소 대신 아침잠을 택한다. 영양제는 거르기 일쑤면서 하루 세 번 찐-한 커피는 꼬박꼬박 챙겨 마셨지. 재택하는 날은 점심시간에도 일을 하면서 끼니를 거르거나 대충 때웠고, 때울 때마저도 배달음식으로 갈음한 적이 더 많았다. (물론 요리를 아예 놓진 않았지만, 예전에 비하면 현저히 줄었다.) 냉장고엔 마켓컬리 식재료 대신 편의점 맥주가 네 캔씩 자리 잡았다. 필라테스 갔다 온 내 자신을 기특해하며 또 하루 열심히 산 대가로 맥주를 벌컥벌컥... 그렇게 하루를 살고 나면 속도 더부룩하고 편두통이 심해서 숙면이 어렵다. 그 상태로 스마트폰을 열면 나보다 더 재밌게 사는 사람, 멋진 여행지로 떠난 사람, 높은 성취를 이룬 사람이 보이면서 조급하고 답답하다. 폰을 덮으면 평소보다 지저분하게 어질러진 집안이 보이는데, 치우기는 또 싫으면서, 동시에 이 꼬라지를 보기도 싫은 모순적인 마음에 어지럽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 붙였다가 일어나면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피로가 나를 삼켜오니, 다시 유산소 대신 아침잠을 택할밖에. 3주는 고사하고 3개월을 내리 아파도 이상하지 않을 삶이었다, 지난 몇 달은.








심지어 아프다고 먹은 죽도 배달시켜서 먹었네...

 감기가 끝나갈 무렵, 정말 오랜만에 남편과 들른 카페에서 "이제 다시 건강하게 살고 싶어졌어" 하고 운을 띄우는 내게 남편이 말하기를, 본인 또한 면역이 무너지고 유지해 오던 정상체중의 마지노선을 넘겼다며, 건강 적신호로 인식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요리를 담당하는 내 식생활이 무너졌으니 나랑 같이 인스턴트와 배달음식을 먹은 남편이라고 멀쩡했을 리 없다. 지난 몇 년간은 건강으로 치면 상위권이라고 자부했던 우리 부부가 이렇게 몇 달 방심했다고 동시에 무너져내리는 건 분명 몸이 보내오는 최후의 경고일지 모른다. 우린 그 훅 가기 좋다는 30대 중반이니까...

 (참고로 더 무서운 건, 그래도 하루 한 끼는 건강한 집밥을 열심히 해 먹었다는 거다. 각자 운동을 아예 쉰 적도 없다. 놓은 게 아니라 예전에 비해 게을리했을 뿐인데도 이런 무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아무튼 이미 엎질러진 물, 손 놓고 있는다고 달라질 건 없다.

이제부터라도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건강하게 살 것을 마음먹어 본다.








 가사청소서비스를 예약했다. 손이 잘 안 닿는 곳까지도 구석구석 먼지를 싹 걷어냈다. 집이 반짝반짝하고 쾌적하니 부지런히 살고 싶은 마음도 몽글몽글 솟아난다. (다시금 말하지만 당연히 청소를 아예 놓았던 것은 아니다. 열심히 로봇청소기에 물걸레청소기로 쓸고 닦고 다 했음. 예전보다 그 횟수가 조금 줄었을 뿐..)


 물만 열심히 챙겨줬지 시선과 사랑을 넉넉히 나누어 주지 못했던 초록이들에게도 열심히 바람과 햇빛을 쪼여줬다. (고양이들에겐 원래 늘 항상 올웨이즈 최선이었고) 식물들에게도 열성을 쏟고 나니, 이제 진짜 내 스스로를 챙겨줄 차례다.




 마트에 다녀와 냉장고를 채웠다. 닭가슴살과 양배추와... 암튼 건강한 재료들을 넉넉히 사다가 먹기 편하게 프렙해 둔다. 재택근무 하는 날은 하루 세끼를, 사무실 가는 날은 하루 한두 끼를 내 손으로 만든 가볍고 건강한 음식으로 채울 것을 다짐한다.


 다짐했으면 바로 지켜야 제맛이다. 자극은 없어도 만족이 가득한 요리들을 곧바로 만들어 먹으니, 이제야 좀 제대로 사는 것만 같다. 남들의 삶? 내 집이 정갈하고 내 식탁이 싱그러우니 (다시 이전처럼) 타인의 삶에는 별다른 관심도 감흥도 없다. '맞다 나 예전에 이랬었지' 싶은 감정들이 피어난다. 한창 내가 내 자신을 살갑고도 정중하게 참 잘 챙기던 그 시절- 딱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감기로 콜록콜록 훌쩍훌쩍거리던 지난 3주도, 혹은 이렇게 살짝 나사 빠진 채 대충 살아왔던 지난 몇 개월도 일종의 우울감이 아니었을까 싶다(사전에 우울을 쳐 보면 '마음이 어둡고 가슴이 답답한 상태'라고 하니 이보다 좋은 설명이 있을까). 매슬로우가 괜히 의식주를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 정의한 것이 아니구나 싶은 게, 의식주의 '식'이 빵꾸나니 내 삶이 '주'를 챙기기도 '의'를 고민하기도 귀찮은 지경까지 액셀 씨게(표준어: 세게) 밟은 것 마냥 파국으로 치닫는 것 같더라(한 번만 더 적자면 겉보기엔 그렇게 엉망으로 살지는 않았다. 그만큼 건강과 내면이 곪았다는 것). 3주를 아프면서 가슴 깊이 느꼈던, 정말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달라지고 싶다는 그 마음을 꼭 쥐고 바로 조금씩 실행에 옮기니 우울을 의욕으로 고쳐 쓰는 데 고작 이틀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혹 누군가가 이런 상태에 있다면, 지금 당장 움직이세요! 꼭!


 어차피 한 번 태어나서 사는 삶, 이왕이면 건강한 몸과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내고 싶으니까- 훗날 또 내 톱니바뀌가 삐걱삐걱 녹슬기 시작하면 잊지 않고 이 마음을 꺼내보아야지. 아픈 만큼 성숙한다더니 그 아픔이 감기였나 싶다. 다시 건강해지자, 내 자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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