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_ 버림받은 노새

당나귀 농장에 웬 노새 한 마리가?

by 사람 여행자

당나귀 농장에서 지낸 지 열흘 정도 지났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읽었던 수고가 아까워 두꺼운 책을 덮지 못할 때처럼,

미련을 가진 체 여기 머무르고 있는 게 아닐까.


여행과 일상 사이의 경계선이 희미해지면서 천천히 흥미를 잃었습니다.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죠.


저는 영국까지 와서 런던과 이곳 클로벨리 마을, 그리고 주말에 잠깐 이웃 마을에 다녀온 게 다였어요.

3주라는 긴 시간을 만리타국에서 보내는 것치곤 살짝 아쉬웠습니다.

이색적인 경험은 충분히 했는데 보편적인 관광이 부족했다고 할까요.

적적한 호스트 마을 떠나 이름난 곳에서 사진을 찍고, 호스텔에 머물며 또래 친구를 사귀고, 쇼핑과 외식을 하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당나귀 농장에 오기 전, 이탈리아 대성당(2장 이탈리아편 참조)에서 신부를 호스트 삼아 지냈잖아요. 그때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으며 지냈는데, 여기서는 혹독한 추위와 궂은일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심한 감기에 걸리기까지 했죠.


개인 여행, 고된 노동, 혹독한 날씨

세 가지 원인이 모였고 저는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떠나는 이유를 노부부에게 모두 말한 건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으로 여행을 더 다니고 싶다,라고만 했습니다.


12764452_893192650801711_3858088944972119646_o.jpg 노새 루퍼트와 함께

떠날 때가 다가올수록 정을 쌓기보다는 정리하는 일에 초점을 뒀습니다.

새로운 장소를 탐험하지 않고, 이미 갔던 곳을 한 번 더 갔죠.


당나귀들에게도 이별을 예고했습니다.

그들은 두 눈을 끔뻑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죠.

그 덤덤한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다시 미련이 생깁니다.

저를 열흘이나 이곳에서 버티게 해 줬던 유일한 버팀목은 바로 당나귀였어요.

날이 지날수록 녀석들을 향한 애정이 커져만 갔죠.

특히, 노새 루퍼트(Rupert)한테요.


혹시, 노새라는 단어 아시나요?

노새는 엄밀히 따지면 당나귀가 아닙니다. 수탕나귀와 암말 사이의 잡종이죠.

당나귀라 하기엔 키가 크고 날씬합니다. 말이라 하기엔 땅딸막하고, 귀와 꼬리가 나귀를 닮았어요.


제가 보기엔 노새 루퍼트는 그저 거대한 강아지입니다.

제가 건초를 쓸고 있을 때마다 소리 없이 다가와 거대하고 길쭉한 뺨을 제 어깨에 비벼댔죠.

이럴 때면 참 기특하기도 하면서 무섭습니다. 아무래도 제 몸무게보다 무거운 동물이 먼저 비비적대는 일은 낯설기만 하네요.


그런 루퍼트는 외롭습니다.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다른 당나귀들로부터 왕따를 당해요.

하지만 절대 기죽지 않습니다. 말의 유전자가 섞여 있어 성격이 아주 쾌활해요.

틈만 나면 친구들에게 다가가 장난을 겁니다.


"퍽!"

돌아오는 건 뒷발차기뿐이에요.

당나귀 뒷발차기 맞으면 진짜 아픕니다.

그래도 루퍼트는 기죽지 않고 다른 당나귀한테 달라붙어요.

"퍽!"

이번에도 또 맞습니다.


그런 불쌍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루퍼트에게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겠죠?

덩치만 친구들에 비해 크지, 실상 나이는 가장 어렸습니다.

호스트 수에게 당나귀 농장에 왜 노새가 있냐고 물어봤더니,

세상에 버림받은 녀석이래요.

이렇게 잘생긴 노새를 누가 버린 걸까요.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꼭 저를 닮았습니다.


동병상련.

한 마리의 노새로부터 인생을 공감하게 될 줄이야.

12764797_893191944135115_6947745776015893588_o.jpg 루퍼트 너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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