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쓰는 2019 안식휴가 에필로그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처음 생긴 목표가 있다. 바로 3년을 꼭 채우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3년 근속 시 생기는 한 달의 안식휴가를 받는 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3년을 채우기까지 크고 작은 일들과 슬럼프가 오더라도 기필코 3년을 지내고서 다음을 고민하기로 마음먹었다.
안식휴가가 100일도 채 남지 않았을 때 사내 알림용 안식열차가 매일같이 잔여일 수를 알려 줬는데, 입사한 지 꼭 3년이 되던 날 종착역임을 알려주었다. '이제 안식휴가를 등록할 수 있다'는 메일까지 받고 나니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 생긴 것 같아 짜릿한 쾌감마저 들었다. 내 안식휴가는 이미 3년 전 목표와 함께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5년 전, 홀로 유학을 떠났던 아일랜드에 가족과 함께 다시 가는 것이었다.
2013년, 아일랜드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아이슬란드인지 아일랜드인지 자주 헷갈려했고, 영국과 같은 나라인지, 다른 나라인지 몰랐다. 아일랜드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던 시기라 하나씩 찾아보면서 그 나라에 대해 알아갈 수 있었지만 여전히 가늠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이 많이 없는 곳에서 영어를 쓰며 잘 지낼 수 있겠냐고 물었지만, 난 우습게도 쌍둥이 동생 없이 1년이라는 시간을 혼자서 보내야 하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
결과적으로 난 목표한 대로 1년간의 유학생활을 잘 마치고 무사히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내가 1년에 한두 달 말고는 매일같이 비가 오고 흐린 나라에서 지치지 않고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그곳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편도 16시간 비행기를 타야 갈 수 있는 우리 집에서, 나만큼 나의 안전과 행복을 빌어주는 가족들 덕분이었다.
2019년, 6년 만에 가족과 아일랜드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난 누구보다 들떴고 신나 있었다. 내가 다시 아일랜드에 가다니. 떠나기 전엔 실감이 나질 않고 온통 날씨와 소매치기 걱정뿐이었는데 막상 비행기에 오르니 머리보다 몸이 어쩔지 몰라 발만 동동 굴러댔다. 그렇게 도착한 아일랜드에선 하루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고, 다 쓴 치약을 돌돌 접어 올려 끝까지 쓰고 마는 것처럼 아낌없이 보냈다. 낮에는 여행 가이드와 총무를 도맡았고 모두가 잠든 밤에는 내일 어디가 날씨가 좋고, 무엇을 해야 엄마와 동생에게 더 멋진 하루를 선물할지 그리다 잠들었다.
앞서 독일 가이드를 맡았던 동생이 아일랜드에서만큼은 온전히 그 시간을 즐기는 게 보였고, 하루가 금방 간다고 말했다. 그렇게 꿈만 같던 아일랜드에서의 일주일이 지났다. 끝났구나. 진짜 끝났어.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엄마와 동생은 아일랜드를 마지막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난 혼자서 전부터 가고 싶었던 스코틀랜드와 포르투갈을 이어 여행하기로 했다. 마지막 배웅길이 꽃길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이제는 도착지가 다르니 엄마와 동생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을지와 택스 리펀 문제로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내 보딩 타임이 두 시간 더 빨라 이만 떠나야 했는데 꼭 물가에 내놓은 아기처럼 불안했다. 잔뜩 가시 돋친 고슴도치로 변한 내 모습을 보며, 딸들과 유럽여행을 온다고 1년 가까이 영어공부를 하셨던 엄마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며 미안해하셨다.
그런 엄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2주간의 여행 동안 영어와 지리에 서투른 동생과 엄마를 챙긴다고 많이 지쳐있었나 보다. 택스 리펀에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주고 내가 먼저 들어가서 어디로 가야 할지와, 사람이 없을 땐 어디에 제출해야 하는지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겠다고 신신당부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한순간에 고슴도치처럼 예민해지다가도 돌아서면 마음이 약해진다.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엄마, 동생을 차례로 안고 이번 여행 함께 해줘서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는 내내 이게 무슨 마음인지 몰라 멍했다. 꿈에 그리던 아일랜드를 가족과 보내겠다는 목표를 이뤘다는 벅찬 감정과 '끝'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공허함 등 복잡한 감정들이 한번에 들었다. 돌이켜 보면 목표하고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하루도 있었다.
유학 시절 좋아했던 바다 달키를 실컷 구경하고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찾아간 식당이 아뿔싸! 휴일이었던 것이다. 문은 연 거 같은데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가게 안을 살피고 있었는데 백마 탄 구세주가 나타날 타이밍에, 까만 자동차를 탄 중년의 남성분이 내려서는 "내가 여기 사장인데, 오늘 휴일이야"하고 비극을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망연자실해하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저기 골목 쪽으로 가면 좋은 식당이 있다"면서 본인 식당 대신 그 식당으로 가는 것을 추천해줬다.
결과적으로 추천받은 식당은 우리의 기대를 넘어설 정도로 맛있고 좋았다. 이렇게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날들도 있었지만 다행히 불행보다 만족스러운 나날들이었다. 이렇게 3년 전부터 목표로 잡고 계획했던 대단원의 막이 내리니 조금 허무하기도 하고, 이제 앞으로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나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영화를 보고 난 뒤 별점과 함께 짤막한 한줄평을 남기기로 유명한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신의 삶'에 대한 한줄평을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인생 전체는 목적을 가지고 전력투구해도 안된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됐고요. 인간이 그나마 노력을 기울여서 할 수 있는 건, 오늘 하루 성실한 것. 그건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 나머지는 제가 알 수 없죠."
목표를 이루면 끝난 게 아니라 다음을 세우면 되었다. 목표를 이룰 수 없게 되더라도, 계획한 대로 되지 않더라도 끝난 게 아니라 그 상황에 맞게 수정해서 나아가면 되었다. 오히려 바꾼 목표가 더 좋은 결과와 기분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그때 그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면 목표에 다다른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하루하루 충만함을 느끼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보낸 몫으로 성취감과 보람을 잔뜩 만끽했으니, 이제 그다음으로 나아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