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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ㅇㅈ Sep 30. 2021

아일랜드살이 일주일 만에 향수병이 찾아왔다

아일랜드 더블린에 온 지 꼭 일주일이었다. 이 날은 사랑하는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타지에 나와 있다 보니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 고심 끝에 특별한 묘책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홈스테이 가족에게 축하 영상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제럴딘은 내 말을 듣고 나서  흔쾌히 엄마, 아빠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내 이름에는 받침이 없고 영어 이름으로도 많이 불리는 편이었지만, 엄마 아빠 이름은 받침이 있는 것도 있고 영어로 비슷한 발음을 내는 단어가 없기도 해서 한 음절 한 음절 트레이닝한 끝에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문제는 제시카였다. 제시카는 아직 말 붙이기조차 어려워 선뜻 부탁하기가 망설여졌다. 처음 홈스테이를 신청할 때 나에겐 선택권이 많지 않았고, 가족에 대한 건 그저 두 가지 질문에 대답했을 뿐이었다.


아이를 좋아하는가
애완동물을 좋아하는가


난 큰 고민 없이 모두 ‘예’라고 입력한 후 홈스테이 결과를 기다렸는데 출국을 얼마 앞두지 않은 날, 불현듯 애완동물을 그저 개나 고양이라고만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혹시 우리나라 가정집에서 보기 힘든 동물을 일반적으로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행여나 동물원에서 볼 법한 동물과 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이를테면, 양이나 말 혹은 이구아나나 도마뱀 등등 말이다. 어찌 보면 몇 개월 만에 유학을 결정하고 모든 게 물 흐르듯 지나가다 보니 출국일이 다가오면서 괜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다행히 내 홈스테이는 엄마와 딸 그리고 강아지가 살고 있는 가정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피상적인 정보에 가까우니 실제로 만나보고 겪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실 설렘보다 긴장감을 더 많이 품고 도착한 홈스테이였다. 호스트 맘인 제럴딘의 첫인상은 마른 편인데도 뭔가 푸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제시카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의 시크한 학생이었다. 사실 나였어도 한창 예민할 시기에, 낯선 외국인과 한 집에서 사는 게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었다. 결국 제시카에게 축하 영상을 부탁하는 건 마음속 고이 묻고 있었는데 저녁 식사 중, 제럴딘이 제시카에게 본인이 찍은 영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제시카의 표정을 살펴보니, 꽤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아 냉큼 너도 영상을 찍어 보겠냐며 제안해보았다. 결과는 대성공! 제시카는 찍는 내내 조금 쑥스러운지 한쪽 팔을 감싸 쥐며 수줍은 듯 한 마디 한 마디를 건넸다. 그래도 분명 느껴졌다. 나의 부모님에게 전하는, 조심스럽지만 드문드문 내비치는 그녀의 진심이 말이다.

해피 웨딩 애니버서리 쑨키종히!


사실 이곳에서 일주일을 맞이하기까지 하루하루가 참 길었다. 새로운 가족이 생겼지만 아직 내 마음을 온전히 보여주고 기댈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나 혼자 고군분투하는 느낌이랄까.


한편으론 내가 왜 이 먼 땅에 혼자 와서 고생하고 있나 생각도 들었고, 엄마 아빠와의 첫 통화 때문에도 마음이 복잡해져서 울적해 있었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도 하루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럴딘과 제시카는 영어를 잘하니까 내가 말을 잘 못해도 알아듣고, 가끔 고쳐주기도 하지만 학원에선 영어를 배우러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자꾸 대화가 끊겼다.


나를 제외한 클래스 메이트 모두가 브라질리언이었는데 쉬는 시간엔 포르투갈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내가 알아듣지 못하니 쉬는 시간에도 꼭 영어를 써야 한다고 말했는데, 처음엔 서툴러도 영어를 쓰는 듯하더니 결국엔 나 혼자 알아듣지 못하는 왁자지껄한 쉬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모든 건 생각하기에 달려 있었지만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가니 속상하고 서글퍼졌다.


나의 클래스 메이트들. 유쾌한 친구들이지만 스탑 스피킹 포르투기..


한국과 아일랜드는 8시간의 시차가 나다 보니 학원이 끝나고도 해가 한창일 시간, 한국은 저녁 시간이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엄마 아빠와 통화를 했고, 엄마 아빠도 궁금했던 부분을 마구 쏟아내셨다.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는지, 음식은 입맛에 잘 맞는지, 영어는 많이 늘었는지 등등. 돌이켜보면 계획한 1년 중 일주일은 고작 1/50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나조차도 하루하루 얼마나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제자리걸음은 아닌지 조급해져 있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축 처져서 걸어가고 있는데 한창 밝은 시간인데도 나 혼자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내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제럴딘이 모처럼 해가 쨍쨍하고 좋은 날씨에 세차를 하기 위해 나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걸 보고는 나도 무작정 돕겠다고 나서서 열심히 세차를 하는데 신기하게 가슴속 응어리도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세차가 끝나자 제럴딘은 연신 고마워하며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차를 타고 어딜 가자고 했다.


그렇게 제시카와 셋이서 저녁을 먹고 멍뭉이 로시까지 함께 간 곳은 ‘더블린 항구’였다. 여기는 인적이 드문 곳인데 가끔 로시를 산책시키러 다 같이 나오는 곳이라 했다. 더블린 항구는 믿을 수 없게 파랗고 아름다웠다. 아까 미처 못 씻겨낸 응어리들이 바닷물과 함께 쓸려가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내가 더블린에 온 이래로 최고로 날씨가 좋아서 행복 게이지가 눈에 띄게 차올랐다. 가족과 내 사람들을 떠나 온 곳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이들 덕분에 에너지가 샘솟는 기분이었다. 잠시 나약해졌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충분했다.


돌아보면 곳곳에 행복이 놓여 있었다. 조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지나쳤던 행복들이었다. 이제 그만 혼자만의 어둠 속을 빠져나올 시간이다. 이렇게나 청명하고 좋은 날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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