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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피오 Sep 17. 2018

13. 미래를 내맡기다

왜 내맡겨야 하는가?


과거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만이 현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기대와 욕망도 현재를 위협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늘 사는 것이 불안하고 두렵다. 불확실한 삶, 한 치 앞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에 의지할 것조차 전혀 없는 이들은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원하는 미래에 대한 커다란 기대와 미래를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지금/여기’에서 늘 조급해 하고 안달하기도 한다. 


우리네 삶을 난기류에 흔들리는 비행기에 비유해보자.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난기류를 만나, 기체가 심하게 흔들린다. 그대는 어떻게 대응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좌석을 꽉 움켜 쥐고 잔뜩 긴장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비행기를 제대로 운전해 달라고 애꿎은 승무원에게 화도 내고, 애원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는 비행기는 물론이고 요동치는 자신의 마음도 안정시킬 수 없다. 하지만 비행기를 자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택한다. 쓸데 없이 힘 빼지 않고, 오히려 좌석 깊숙이 몸을 누이고 이 흔들림을 즐긴다. 마치 놀이공원의 기구를 타듯이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과 다른 존재에게 내맡겨야 할 영역을 확실히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펼쳐지는 미래(Unfolding World)‘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자연의 현상들이 자신을 관통해 지나가도록 놔두는 것이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에 내맡겨야 할 때가 있다. 그러지 않고 미래를 스스로 ‘통제‘하려 들면 오히려 무수한 부정적 감정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면 의구심이 생긴다. ‘도대체 무엇을 어디에 내맡긴단 말인가, 이렇게 위험한 세상에서 내 미래의 삶을 통째로 방치하란 말인가?’ 


그러다 보니 ‘미래를 내맡긴다’는 말이 참 무책임하고 나약하다는 인상을 준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다른 존재에게 일임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무책임하거나 나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매우 용기 있는 결단이다. ‘내맡긴다‘는 것은, 현시점에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세상에는 ‘과정과 결과’가 있다. 과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면 결과는 안달하지 말고 그냥 내맡기라는 것이다. 안달해봐야 달라질 것이 없으니 내맡기는 것이 보다 전략적이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오면 받아 들이고, 그 다음 과정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또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인사대천명 盡人事待天命‘ 이다. 단순하지만 매우 깊이 있는 깨달음이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과거에 대해서는 주로 죄책감, 분노, 자부심과 같은 부정적 감정이 결부되듯이 미래에 대해서는 주로 두려움, 욕망 같은 부정적 감정이 결부된다. 두려움이 무슨 감정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주 원초적인 감정으로서 늘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한다. 특히 오지 않은 미래, 즉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은 유사이래로 늘 인간에게 존재했다. 사실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 때문에 인류는 거친 원시 환경에서도 생존력을 높일 수 있었다. 


두려움과 같은 본능적 감정은 복잡한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고 바로 근육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숲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듣고도 바로 근육이 작동하게 된다. 나도 동네 생태공원을 산책하다가 숲 속에서 부스럭대는 소리를 듣게 되면 무의식 중에 몸을 움찔하면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게 덩치가 큰 까치나 맷비둘기가 먹이를 찾아 걷는 소리, 또는 길고양이들이 어울려 노는 소리 임을 알게 되면 그냥 무심히 지나친다. (물론, 먹이 찾아 헤매는 멧돼지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런 주택가 생태공원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다 그렇지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확실성이 사라졌을 때의 반응일 뿐이다. 방금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예기치 않은 부스럭 소리에는 마치 야생 정글에서 천적을 만났을 때와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아주 먼 옛날 정말 숲 속에서 늑대나 호랑이를 마주 친 조상들의 두려움이 고스란히 내 유전자 속에 전해 내려 온 것이다.  아마도 내 조상들에게 그런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기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스럭 소리에도 근육이 자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던 인간들은 대부분 늑대나 호랑이의 먹이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그 본질적 대상은 ‘상실‘임을 알 수 있다. 모든 두려움은 내가 가진 소중한 뭔가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호러 영화를 보면서 초자연적인 존재, 즉 귀신이나 악마 따위를 두려워하는 것도 그 본질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바로 자신의 생명, 목숨을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추악하게 생긴 괴물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들이 우리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엄마의 품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새근새근 자는 아기에게도 엄마로부터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엄마가 마실이라도 나가려고 살짝 애를 떼어내면 애들은 어떻게 알아 차렸는지 울고 불고 난리를 친다. 엄마라는 포근한 존재를 상실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호시절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도 두려움이 있다. 호시절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 호시절이 다 가고 나면 어떡하나 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무의식 속에서 새록새록 자라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특히 불확실성에 민감하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위험한 것과 동일시하는 데 사실 ‘불확실성‘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라 반드시 위험한 것만은 아니다. 말 그대로 불확실하기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지만 또 뜻하지 않은 행운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불확실성이 위험하다는 편견이 있다. 그래서 불확실성을 회피하려는 성향을 가지게 된다. 


네덜란드의 조직심리학자 홉스테드의 조사연구에 따르면 특히 우리나라는 일본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불확실성 회피 지수가 높은 군에 속한다. 불확실성 회피 지수가 높다는 것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혹은 두려워한다는 의미다. 이런 경향이 강한 문화에서는 어떻게든 불확실성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가 보다 더 확실해지게끔 하기 위해 지금 뭔가를 열심히 한다. 그래서 저마다 바쁘고 안절부절못하며 감정적이고 공격적이며 활동적이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하면 떠오른다는 ‘빨리 빨리‘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불확실성 회피경향이 높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스스로 항상 바빠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쁘지 않다는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 것이 되어 두려움을 더욱 증폭시킨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지만 그 동기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에 늘 불안해 보인다. 


반면, 불확실성 회피 경향이 약한 문화에서는 불안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 불확실성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가 어떻게 펼쳐지던 받아들이고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난기류에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오히려 좌석에 몸을 깊이 누이고 흔들림을 즐기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공격성과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자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감정적으로 행동하거나 요란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차이가 난다. 필요하다면 열심히 일할 수도 있지만, 내부에서 솟아나는 어떤 압력 때문에 활동을 끊임없이 계속하지는 않는다. 보다 긍정적인 동기, 재미나 보람 때문에 일에 몰두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그들은 쉬는 것을 좋아한다


불확실성 회피는 모험 회피와 다르다. 불확실성 대 모험의 관계는 불안 대 공포의 관계와 같다. 공포는 뚜렷한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을 극복하면 해결이 되는 반면, 불안은 막연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므로 그 자체가 삶의 방식 혹은 존재 방식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같이 불확실성 회피 성향이 강한 문화에서는 사회 전반에 삶에 대한 불안이 퍼져 있고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늘 불안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등 개인의 삶을 둘러싼 환경들이 더욱 불확실해지고 있다. 이것은 여전히 불확실성 회피 경향이 강한 문화 속에 사는 우리들의 삶이 더욱 불안해진다는 의미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거기에 대해 대비하고자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미래에 최악의 경우가 발생할 확률이 딱히 높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 상황인 최상의 경우도 있고, 또 다른 경우의 수도 많다. 미래는 무수한 경우의 수로 발생한다. 최악의 경우도 그런 여러 ‘경우의 수’중에 하나일 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당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이것도 미래의 무수한 경우들 중 하나일 뿐인데, 그것이 최악의 경우이다 보니 다른 경우들보다 두드러지게 보인다. 두드러지게 보인다 해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닌 데도 우리는 그것이 당장 닥쳐올 재앙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최악의 경우에 대한 대비책을 단기간에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악의 경우란 그야말로 최악이라서 당장 대비책이 마련되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시간과 정신적/물질적 에너지를 투자해야 마련되는 것이다. 요즘은 40대 후반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직장에서 퇴직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만, 막상 퇴직 후 대비책을 마련하려고 하면 당장 무슨 준비를 해야 할지 누구나 막막하기 마련이다. 퇴직이라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연구와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직장을 다니는 40, 50대들은 대부분 실직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원치 않는 실직’에 대한 두려움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나타난다. 우선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당장 그 다음 날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상상을 하게 된다. 아침에 출근 하지 않아도 되니 늦잠을 푹 잘 수 있겠거니 하겠지만 그것도 며칠뿐이다. 관성에 의해 늘 새벽 5-6시면 눈이 저절로 떠지게 된다. 그리고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이 휴가라면 축복이지만 실직에 의한 것이라면 감옥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직장에서는 매일 같이 종일 불이 나던 스마트 폰에 단 한 통의 통화도 문자도 없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잊혀져 버린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모두들 무인도 홀로 남겨진 ‘로빈슨 크루소’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그나마 심리적인 것이지만 물질적으로도 당장 매달 들어가야 할 생활비며 세금이며 보험료는 어떻게 조달 할 것인가 등등 실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최악의 상황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르고, 그런 최악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비할까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모아 둔 돈으로 해볼만한 것이라고는 빵집이나 치킨 집 정도인데 이미 살고 있는 동네에 그런 류의 상점들은 너무나 많아 보이고 또 장사도 그렇게 신통치 않아 보인다. 신문에서는 퇴직하고 창업한 사람들의 몇 퍼센트가 1년 안에 폐업을 한다는 둥, 도대체 안 좋은 뉴스들만 들린다. 그러다 보니 실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되고, 그러면 실직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지기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직장에 다니면서 이렇게 실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 마치 ‘나를 해고 시켜줘‘라는 말을 이마에 써 붙이는 격이 된다. 이미 실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감이 사라지고 상사나 동료들의 눈치만 보게 되는 등 매사 소극적이고 방어적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은 실직에 대한 두려움이 실직을 불러오는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두려움은 항상 두려워하는 대상을 불러 들인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심해지면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게 확률상 잘 일어나지 않을 최악의 경우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자신의 두려움을 더욱 강화시키게 된다. 이것도 바로 ‘과도한 생각‘의 폐해다. 그런데 여기다 한술 더 떠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최악의 경우에 대한 – 단기간에 준비하기 힘든-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작 지금/여기에서의 하루하루 삶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진다. 두려움이 인간생존을 위해 순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역기능을 하는 꼴이다. 미래를 잘 대비하려는 이런 두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미래가 오기도 전에 지쳐버리게 만든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해 하룻밤 사이에 머릿속에서 끊임 없이 수많은 시나리오 썼다가 지우고, 대비책을 고민하느라 온갖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 붓지만 아침이면 모든 것이 제자리인, 그런 경험들을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다 해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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