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도 말했지만 과거에 대한 부정적 감정들은 인간을 딱딱하게 만든다. 흐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물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중력으로 대변되는 자연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물처럼 형제가 없고 유연해야 흐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부정적 감정들은 인간을 딱딱한 바위처럼 정형화된 존재로 만드는 것일까?
사실, 인간을 정형화시키는 것이 과거에 대한 부정적 감정만은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육체와 의식은 ‘나‘라는 자기감을 만들어낸다. 그때부터 인간은 육체와 의식을 자기로 동일시하면서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 간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이때부터 정형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육체는 그 좋은 예이다. 자라면서 변해가지만 유전을 통해 일정한 모양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의식도 점차 정형화 되기 시작한다. 수많은 교육, 경험과 시행착오 등에 의해서 의식이 프로그램 되면서 일정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공장에서 막 출시된 PC 하드웨어에 사용자가 필요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까는 것처럼, 순수하고 투명하던 인간의 의식에 세상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깔리기 시작한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깔리는 프로그램은 ‘범주화‘이다. 범주화는 말 그대로 같은 속성의 것을 하나로 묶는 것을 말한다. 가장 기본적인 범주화는 나와 나 아닌 것을 묶어서 구별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자기감‘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 아닌 것‘들도 사물, 동물, 식물 등으로 범주화된다. 아기가 엄마, 아빠에게 이미 범주화된 세계를 하나씩 배워가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 프로그램화인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의해서 주입되는 프로그램은 ‘자극과 반응‘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한다. PC에 특정 프로그램을 깔고 키보드를 누르던가 마우스를 클릭하면 프로그램들이 작동된다. 이 때 PC는 사람이 의도한 대로 특정 자극을 주면 특정 반응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PC의 반응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고 또 그래서 PC를 통제할 수 있다. 이런 원리는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교육과 시행착오로 인해 인간에게 자극을 해석하는 프로그램이 깔리게 되면 인간 역시 PC처럼 특정 자극에 대해 거의 무의식적으로 특정한 반응을 하게 된다. 위험한 상황이 감지되면(자극) 피하고(반응),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자극), 분노하는(반응) 것 등이 다 자극에 대해 프로그램된 대로 반응하는 예이다.
어떤 프로그램들은 PC의 작동에 꼭 필요한 것이듯, 인간에게도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프로그램들도 있다. 파란 불이라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저쪽에서 차가 전속력으로 달려 오고 있다. 이것을 보고도 즉각적으로 피하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삶을 유지하는 데 유익한 프로그램들도 있다. 처음에는 모든 프로그램들이 이렇게 인간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진화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사바나와 같은 거친 원시 환경에서는 생존을 위해 도움이 되었던 프로그램들이 오래 전 사바나를 벗어나 문명화되고 과학화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발목을 잡는 덫이자, 인간을 일정한 형태로 굳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물처럼 유연하게 흘러가는 삶을 살지 못한다.
물처럼 흘러가지 못하는 삶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불유쾌한 경험들에 대한 부정적 감정에 사로 잡혀 있다면, 그 당사자의 마음도 몹시 괴롭다. 모두들 경험이 있겠지만 끊임없이 과거의 일을 회상하면서 후회나 자책을 거듭하고, 또는 분노나 원망을 거듭하게 되면 그 자체가 고통이다. 그래서 붓다는 ‘첫 번째 화살은 맞았을지언정,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라고 설파했다. 얼마나 대단한 통찰인가. 과거의 경험, 그 자체도 고통인데 그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며 고통 속에 덫 칠해진 부정적 감정을 반복해서 느낀다면 첫 번째 화살을 맞아 난 상처에 계속해서 다른 화살을 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도 첫 번째 화살은 다른 사람이 쏜 것이라지만 두 번째 화살부터는 자신이 자신에게 계속해서 쏘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첫 번째 화살은 타인이 쏘았지만(자극) 그것을 맞고 고통을 느낀 것은(반응) 어쨌던 나 자신이다. 그리고 두 번째부터는 스스로가 쏘고 스스로 맞는 꼴이다.
게다가 이렇게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혀 특정 자극에 특정 반응을 연속적으로 하게 되면 쉽게 경쟁자들의 먹잇감이 된다. 정형화된 존재, 즉 A라는 자극을 주면 B라고 반응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한 대상은 항상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총과 같이 원거리에서 사냥할 수 있는 무기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거대한 맘모스가 훨씬 작은 인간의 사냥감이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소리를 지르면(자극) 놀라서 도망가고(반응), 이를 이용해 좁은 구석을 몰아 넣으면 서로 엉키고 설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인간이 터득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동물들은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극에 대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반응을 수정하고, 임기응변하며, 규칙과 습관이라는 세상이 주입한 프로그램의 무게를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같은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다. 아니 그런 능력이 있음을 알 경우에도 동물적 본성에 굴복했을 때의 편안함을 선호하여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한다. 그 이유는 동물적 본성에 따르는 것이 아무런 노력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어리석게도 그들이 다른 사람을 동요시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에는 주도권을 쥐기 위해 의도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동요시키는 방법으로 죄책감이나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타인에게 주입시키려는 사람들이 늘 존재한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정형화되어 있으면 누군가의 사냥감이 될 수 있다. 인간사회에서 사냥을 당한다는 것은 부당하게 타인에 의해 이용 당하고 착취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자신이 가진 지위나 부, 권력 등을 부당하게 빼앗길 수도 있다. 이럴 때 비정형은 훌륭한 전략이 된다. 내가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경쟁자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고래로부터 비정형, 즉 예측 불가능성은 대체로 지배자들의 전략이지만, 약자들 또한 그것을 활용해 커다란 성과를 거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