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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나 Aug 25. 2022

북미 이주기 혹은 몇 달 살이,  그 무엇이든

밴쿠버 생활의 시작

몇 달간 글을 쓰지 못했다. 큰 인간적 배신과 배임을 당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몇 가지 인생의 레슨을 얻었다고 자위하고 있다. 그 몇 가지는 너무 감정적인 사람과는 적당한 거리를 둘 것, 짧은 기간에 사람을 쉽게 믿지 말 것, 친구와 돈거래하지 말 것. 뭐 이 정도 되겠다. 결국 지금 내가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곳은 캐나다 밴쿠버 남쪽의 한 가정집 뒷마당이다. 훌훌 털어 버리기 좋게 다행히 삶의 터전을 잠시 혹은 영구히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평일 오후 6시 15분인 현재 여덟 명의 캐나다인과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아 글을 쓰고 있다. 나를 포함 다섯 명은 맥북으로(역시 북미인가!), 한 명은 델로, 한 명은 아이패드로, 두 명은 손글씨로 글을 쓰고 있는 이 모임은 Shut up and Write! Vancouver이다.


외국살이의 시작은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아니겠는가. 뚜렷한 소속이 없는 상태로 동생을 따라온 장기 타향살이라 그런지 여행보다는 생활로 삶이 시작되었다. 회사를 다니던 학교를 다니던 어떠한 소속이 있다면 사람을 만나기도 쉬울 텐데, 지금 나에게 닿은 연이란 밴쿠버에 살고 있는 독서모임 언니의 친동생과 그의 회사 동료, 둘 뿐이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 필요하다면 리스크 테이킹을 하더라도 새로운 모임에 배팅을 해 봐야 하는 법! 로컬과 그곳에서 타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어플을 통해 모임을 찾아봤다. 즉석만남(?) 위주의 네트워킹 그룹들과 운동모임이 당연 다수였으나, 각각 위험도가 높아 보인다는 이유와 개인 스포츠를 즐기는 성향으로 인해 많은 모임들이 걸러졌다. 그러고 나서 찾은 것이 이 글쓰기 모임이다. 글쓰기 모임에 가입하고 나서 이 모임에 나오기까지의 몇 주간 나의 기질적 위험회피와 내향적 성향을 다시 한번 느꼈다. 모임을 나가서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과 나가서의 어색함에의 두려움 사이에서의 갈등에 RSVP(블란서말로 리스폰스 씰부쁠레, 즉 답 좀 주세요)를 전송하기까지 며칠, 전송하고 나서 모임에 누가 오는지 살펴보는데 며칠이 걸렸고, 갈지 말지 걱정하는 것은 현관문을 열고 운전을 해서 모임 장소의 문을 열기 전까지 고민했다. 모임 장소의 문을 열고 들어온 데에는 외향성과 내향성 사이에서 외향성이 이겼다기보다는, 쓰고 싶다는 갈증,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가 더 큰 몫을 했다.


이런 가정집의 뒷마당에 책상을 깔고, 모임 이름대로 조용히 각자의 글을 쓴다.


마찬가지의 것이 늘 나를 새로운 곳으로 이끈다. 한국에 돌아가서 6개월 정도의 시간을 지내는 동안 또다시 지겨움이 몰려온 와중이었다. 친구가 유튜브 클립을 하나 보내줬다. '불안이 새로움을 추구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다녔던 앤서니 보데인의 삶을 다뤘고 그의 슬픈 마지막이 있었다. 불안이란 늘 새로운 일, 새로운 경험과 삶의 터전을 찾아 돌아다니는 나와, 영상을 보내준 그녀 모두에게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앤서니 보데인의 슬픈 마지막이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걸 좋아한다고 당당히 얘기하던 나를 돌아보게 하여서 아직까지도 나에게는 불안이 가득하구나 하는 생각에 살짝 한숨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겨운 안정과 불안한 도전 사이에 또 한 번 나의 안정은 패배했다. 일 년의 백수생활에 몇 달을 더 보태보기로 했다. 나의 타지 생활에서 용기를 얻어 동생이 추진했던 몇 년 간의 캐나다행에 경험자의 정착 서비스 및 육아도우미의 명목으로 슬쩍 발을 내밀었다. 백수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해 줄 미국 서부여행도 끼워 넣었다.


그렇게 나와 연이 닿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해보았던 곳인 밴쿠버 서쪽 끄트머리에 내 한 몸 뉘일 곳이 생겼다. 밴쿠버행을 생각했을 때의 마음은 3개월 정도 살아보자였지만, 지금의 마음은 북미에 오래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자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방법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북미에 정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비자가 제일 큰 문제다. 나를 증명해야 하는데 현재 내가 가진 게 없다는 것에 억울한 마음이 슬쩍 들이밀었다. 내 나라에서는 나를 바닥부터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을, 마찬가지의 당연한 이치로 이곳에서는 처음부터 증명해내야 한다. 나 자신의 삼십 년 넘는 인생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을, 이곳의 나는 괜히 억울하다.


돌아보면 현재의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을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몇 년 전의 나를 발견한다. 그 당시의 나는 늘 미래를 계획하고 설계하며 살아왔지만, 인생은 나를 마땅히 계획했던 그곳으로 이끌지 않았다. 어차피 모를 거 좀 더 확실하지 않은 삶 쪽으로 무게를 두기로 했다. 얼마 전 호기심에 해보았던 기질검사에서, 타고나길 강한 위험회피의 기질을 갖고 있음에도 현재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성숙한 성격을 형성시켰다는 해석을 받아보았다. 감사한 결과였다. 늘 불안하고 괴롭고 걱정이 많았지만, 그 과정이 헛되지 않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불안이 나를 성숙하게 한다면 조금 더 불안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맘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알 수 없는, 조금 더 불안한 미래에 배팅한다. 위험도 높은 배팅은 더 높은 배수의 이익 또는 더 높은 배수의 실패를 가져온다. 그 실패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성숙한 어른의 몫이라고 하듯이.


이곳은 위도가 높아서 오후 여덟 시가 가까워옴에도 하늘은 밝고 파랗다. 노트북에 비친 파란 하늘과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오락가락하며 방사형의 무지개를 만든다. 커다란 해먹이 있는 뒷마당에서 조용히 사람들과 키보드를 두들기는 지금은 참 평화롭다. 커다란 불안 사이의 평화로운 시간이다. 그간 마음이 불안하여 혼자서 무언가를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혼자 쓰기 시작하면 무언가 커다란 감정이 덮쳐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서로 무엇을 쓰는지 묻지 않고, 둘러앉아 각자의 글을 쓰는 이 모임에 오니 금방 한 편의 글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두 시간 동안 지금의 내 삶에 정당함을 부여해준 느낌이다.


 모임을 신청했다고 이야기했을  흥미롭게도 내향인 친구들만이 관심을 보였다. 모임 후기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후 시간을 선사해 준다고 나의 동생과 밴쿠버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에게 이야기해 주어야겠다. 왠지 해외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글을 쓸 것 같은 김영하가 된 기분과 함께.


가히 바이커들의 천국이라 할 수 있는 밴쿠버에서, 자전거를 타고 글을 쓰러 온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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