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주는 위로
책과 음악, 영화, 전시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유튜브 알고리즘의 렉카에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의 나에겐 유튜브만이 가능한 소비임을 보면서, 독서나 음악, 영화와 유튜브는 다른 카테고리로 묶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있는 독서모임에서 정해진 책만 어거지로 꾸역꾸역 읽었고, 그마저도 집중하기가 어려워서 몇 날 며칠을 한 페이지만 붙잡고 있기도 했다. 한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핸드폰을 켜서 링크드인과 주식어플, 네이버 카페, 이메일과 인스타그램, 유튜브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같은 문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다시 그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핸드폰에서 들여다본 어플들만 봐도 내가 무엇이 불안한지가 느껴졌다. 나의 미래의 일과 돈과 바로 앞의 호기심 앞에 책 속의 문자들은 눈앞에서 흐릿해졌고, 결국 불안에서 도망치는 곳은 그것을 잊을 수 있는 강렬하고 화려한 짧은 영상들이었다.
불안이 나를 체하게 만들었다.
나에게 아무것도 들어가지 못하고 나오지 못했다. 그냥 꽉 막혀있었다. 시공간을 돌아다니지만, 아무것도 나를 통과하지 못하는 단단한 고체가 된 것 같았다. 그 어떤 것과도 상호작용하지 못하는.
불통의 고체가 되어 한창 불안이 이어진 두 달 여가 지나고 몇몇의 순간과 사람들이 찾아오자 불안이 만든 체기가 서서히 내려갔다. 생판 몰랐던 사람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어딘가 쓰임이 있는 사람이라는 안도감이 체기를 무르게 했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불안은 자꾸 여행의 욕구를 불러일으켜 타지에서도 자꾸 여행을 떠났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향하지 않았을 낯선 타국에 정착해 있는 소중한 인연과의 캐리비안의 바다에서의 일주일간의 대화가 불안을 한 번 더 잠재웠다. 몇 년 전의 나라면 콧웃음 쳤을 타로와 점사가 에메랄드빛 바다 앞에서 나를 위로했다. 미래의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어떠한지 다시 돌아보게 했다.
불안의 식체가 풀리니 다시 문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에리히 프롬, 쇼펜하우어와 니체, 우파니샤드를 읽어 내려갔다. 시작은 내 불안을 이해하고자 시작했던 에리히 프롬이 쇼펜하우어로 이끌어 왜 나는 염세주의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해주었고, 그가 설명한 욕망이 있는 조건하에서만 존재하는 염세주의를 만나자 왜 내가 자꾸 모든 상념을 물리치려는 요가에 빠져들었는지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었다. 조건이 붙어있는 염세에서 벗어날 틈이 보이자, 세상을 긍정하는 니체가 궁금해졌고, 건강한 경쟁을 긍정하는 니체로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 늘 깊이 생각할수록 두려워지는 죽음의 공포에서 처음으로 벗어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철학자들이 주는 위로는 그 어떤 공감보다도 강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