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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나 Feb 26. 2022

사랑이 필요한 거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작년 말부터 '어려운 책 털기' 모임을 하고 있다. 읽고 싶지만 그 분량이나 난이도에 겁을 먹어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책들을 같은 기간 동안 함께 읽고 독서모임을 하는 형태로 진행하고 있다. 첫 책으로는 사놓고 10년째 읽지 않고 있던 '내 이름은 빨강'을 함께 읽었고, 이번 책은 1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 두께만으로 압도당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꾸역꾸역 억지로 읽을 나를 상상하였는데, 뒷부분으로 가면 전개가 빨라져 소설의 흐름 자체만으로도 흡입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의 대화 내용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깊은 고민의 흔적들이 엿보여 흥미로웠다. 독서 후에도 계속 곱씹으며 생각을 발전시켜나가게 되는 경험이 꽤 생소했는데, 왜 고전을 읽으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달까. 최근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 세계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는 중인데, 그동안 세상의 주목이 중국으로 쏠려있던 터라 잘 몰랐던 러시아의 역사와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러시아적인 특징들에도 흥미가 생겨서 여러 통로로 찾아보며 알아가는 중이다.


이 책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카라마조프가에는 아버지와 세 아들이 있는데, 세 아들 중 무신론자인 똑똑한 둘째 아들 이반과 수도사로서 신을 믿는 셋째 아들 알렉세이를 통해 무신론과 유신론 사이에 갈등했던 도스토옙스키의 생각들이 드러난다. 특히, 이반과 알렉세이의 대화들과 이반이 섬망증을 겪으며 마주하는 또 다른 자아와의 대화 부분이 매우 흥미롭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년엔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죽기 전에 완성한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그의 인생을 관통했던 질문에 대한 생각을 인물들의 말에 녹여 풀어내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의 세계를 부정하는 이반의 내면에서 가장 많은 갈등을 보여준다. 초반의 표도르와의 대화에서 이반은 신과 불멸, 악마 모든 것을 부정한다. 점차 신 자체보다는 신이 만드는 세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구체화되는데, 그 근거로 이 세계에서 순수한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들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들고 있다. 신이 있다면 세상은 아름답게 흘러가야 하는데 문제는 세상은 합리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다.


세상에 모든 것이 합리적이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세상은 합리적이지 않기에 사람들은 이상적인 삶이 아닌 실제의 삶을 살고 있고,  삶에는  고통이 수반된다. 이반의 세계엔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반은 슬프게도 이러한 고통의 삶의 이유에 대한 대답도 얻을  없다. 결국 삶에 대해 염세적여질 수밖에 없고, 염세와 회의의 결말은 죽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반은 동생에게 논리를 거역해서라도 '살고 싶다'라고 고백한다. 비록 사물의 질서를 믿지 않더라도, 푸른 하늘과 봄에 피는 이파리, 별다른 이유 없이 정이 가는 주변의 사람들이 소중하기 때문에 생을 긍정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것을 논리로 이해하려는 삶은 피곤하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했던 일은 정부와 가격을 놓고 협상을 하는 일이었는데, 실무자 입장에서의 협상이란 논리를 만들어 상대방의 논리에 반박해야 하는 일이 주였다. 상대방이 어떤 논리를 들고 나올 것인지 여러 주장들을 미리 예상하여 펼쳐놓은 다음 그 주장들에 어떻게 카운터 펀치를 날릴 것인지를 생각하는 일은 아주 가끔 희열을 느끼게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매우 피로한 일이었다. 요 몇 년 한국사회는 이런 피로한 일이 생활 깊숙이까지 침투해 버린 느낌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유신론을 대표하는 알렉세이가 신을 믿기로 마음을 먹음에 따라(선언) 신이 만든 세계에 살게 되듯, 사람들은 자신이 믿기로 한 어떤 생각이나 세계관(=신)에 논리적으로 어긋나는 행동이나 생각을 전시하는 상대방에게 논리로 저격하며 물고 늘어진다. 그리고, 논리로 세운 세상이기 때문에 자신은 완벽해야만 한다. 세상에 유행하는 모든 생각들이 그 자신들을 피로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페미니즘이 그러하고, 반페미니즘이 그러하고, 환경주의가 그러하고, 반환경주의가 그러하고, 비건이 그러하고, 비건에 반대하는 진영이 그러하다. 완벽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고, 완벽하지 않은 남을 비난하며, 완벽하지 않은 본인에 죄책감을 가진다.


그러나 신이 만든 세상이 완벽하지 않듯, 어떤 사상도 논리적으로 완벽할 수는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결국 종교의 편에 선다. 소설 속 소설인 '대심문관'에서 그리스도의 재등장에 대심문관은 그리스도를 말과 논리로 패 버리지만, 결국 그리스도는 그에게 입맞춤으로 화답한다.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에게의 입맞춤, 논리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로 대변되는 그 어떤 것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특히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도 손을 내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라벨이 붙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논리를 넘어선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주로 종교의 기본정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와 불교의 기본정신이 사랑과 자비 아니던가. 그러나 이 시대의 종교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사회는 급속도로 탈종교화되고 있다.


2021년 한국갤럽의 '한국인의 종교 1984-2021' 리포트에 따르면, 한국인의 탈종교 현상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30의 젊은 세대에서의 탈종교현상이 두드러지는데, 2004년의 20대 중에서는 45%가 종교를 믿었지만, 10년 뒤인 2014년의 20대는 31%, 2021년의 20대에서는 22%만이 종교를 믿었다. 30대의 종교인 비율 역시 2004년 49%, 2014년 38%, 2021년 30%로 꾸준히 감소세에 있다.

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208


위 조사에서 처럼 현대사회의 종교는 사랑의 실천에 있어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종교인의 종교를 갖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그저 '관심이 없어서'인 것처럼 종교는 젊은 현대인들의 생활 속에 관심거리가 아니다. 게다가 일부 종교인들이 보이는 조건적 사랑의 모습은 결국 논리싸움을 다시 불러들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을 찾을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가득한, 이성으로 똘똘 뭉친 현대인들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싶다.


논리로 모두를 박살 낼 수는 없다고. 우리는 조금 더 서로에게 관대하고, 자비로울 필요가 있다고. 완벽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을 겸허히 깨닫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 줄 필요가 있다고.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하려면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도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은 수동적 상태가 아닌 '활동'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랑을 하고 있다면 느끼는 상대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처럼, 사랑의 능력은 늘 긴장, 각성, 고양된 생명력의 상태를 요구한다. 사랑은 어떤 결심이고 능동적인 행동 방식인 것이다.


'사람은 싫지만 인류애는 있는 편이에요'라며, 부끄러운 말을 당당히 떠들고 다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요즘엔 인류애보다 내 주변의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것이라고 뼈저리게 느낀다. 지구 반대편의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유니세프 정기후원하는 것은 어려운 결심이 아니지만, 내 주변의 독거어르신들에게 목욕봉사를 가거나 내 눈앞에 추위에 떨고 있는 부랑자를 피하지 않고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에는 훠얼씬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사랑의 실천에 개인의 노력으로 밖에 답을 낼 수 없는 마음은 참으로 답답하다.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고민스럽지만, 개인을 넘어서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 동지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덧. 이 글의 제목은 변진섭의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에서 따왔다.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사랑에 대한 글을 써야지 생각하며 자연스레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사만 생각나서 가수를 찾아보니 변진섭 아저씨의 곡이었다. 생각해보면 변진섭 아저씨의 명곡이 참 많다. 숙녀에게, 그대 내게 다시, 너무 늦었잖아요,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너에게로 또다시 등등. 그중 요즘 꽂혔던 건 '로라' 였는데, 한 동안 한 곡 반복을 하다, 알고 보니 작곡가가 윤상이어서 나의 소나무 취향에 다시 한번 소오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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