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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나 Apr 24. 2022

MBTI 가 싫은 이유, 드디어 깨달았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지식의 전당이라는 대학은 그 가혹한 등록금의 값만큼 최대한 공짜로 뽑아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 뽑아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와서 대학 때 학교에서 제공하는 많은 혜택들을 누리지 못했던 것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중 가장 아쉬웠던 것은 대학 때 보통 학교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심리상담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공짜로 혜택을 누렸던 것이 하나 있는데, 학교에서 신청자 대상으로 진행해주는 MBTI 검사를 받아본 경험이다. 학교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와 둘이 나란히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보고 꽤나 끄덕끄덕 순응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친구는 '성인군자'라는 별명을 가진 유형으로 결과지를 받아보았는데, 늘 모든 것에 관대하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며, 사소한 것에 괴념치 않아하는 외유내강형인 친구에게 참 잘 어울리는 유형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십오 년쯤은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MBTI 광기에 휩싸여 있다. 내가 대학생 때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격을 네 가지로 나누어 가늠했던 것이 이제는 그것의 곱절인 16가지로 사람을 분류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장난으로 이야기하는 MBTI 대화에서도 묘한 조롱과 우롱의 뉘앙스가 읽힐 때가 많았다. 혹은 더욱 교묘하게는 MBTI에서 분류하는 네 가지 선호 지표에 따라 나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비난할 때 활용된다. '걔는 S라서 작은 것에 집착하고 숲을 못 보잖아' 라던가, '누구는 T라서 공감능력이 없어서 인간관계는 어떻게 맺는지 모르겠어'라던지, '나는 J 들이랑 여행은 못 가겠어. 매분 매초를 계획하는 사람들이랑 어떻게 여행을 가' 라던지 하는. 아마 요즘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들일 것이고, 그 대화의 뒷면을 살펴보면 나와 다른 남에 대한 비난이다. 처음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뻔히 다른 선호 지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돌려 까기를 마음 편하게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MBTI가 남 욕 하는데 더욱 큰 도움을 주고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 가끔 내 앞에서 자신의 선호 지표를 활용해 자신을 올려치며 나를 내려친다던가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묘하게 기분이 나쁜 경우가 많아 그래서 'MBTI는 별로 기분 좋은 것은 아니군' 정도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북튜버계의 대통령, 겨울 서점이 극찬한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러한 내 감정이 왜 불편하였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이 책은 에세이도 아닌, 소설도 아닌, 평전도 아닌 어떤 것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의 책이다. 저자인 룰루 밀러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통해 배운 삶의 의미는 우리는 세상의 '점 위의 점 위의 점'과 같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 인생의 무의미에 대한 해석을

그러니까 너 좋을 대로 살아


라는 말로 일갈한다. 그리고 밀러는 우리 존재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에 반하는 인생을 살아간 한 남자를 깊이 파내려 가면서 이 의미 없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깨닫는다. 그녀가 덕질을 했던 이 남자의 이름은 스탠퍼드대학교의 초대 총장이었던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이다. 그는 수많은 물고기들을 발견해내고 이름을 붙이고 분류해주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물고기에겐 자신의 이름을 딴 라틴어 학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사람은 발견한 모든 생물체는 라틴어 학명을 붙여주는데 그 것이 바로 분류학의 일이다. 이 라틴어 학명은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고, 첫 단어는 그 생물체의 속명, 두 번째 단어는 종명이다. 학교 다닐 때 미생물들의 학명과 생약들의 라틴어 학명을 외워야 하는 시험공부를 하며(아직도 왜 외웠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별 희한한 말 만들기를 발명해서 기억하기 쉽게 외우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그중 많은 이름들은 발견한 사람이나 발견한 지역의 이름을 딴 경우가 많은데, 발견한 지역이면 그나마 연상작용이라도 할 수 있지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딴 경우엔 연관성이 전혀 없어서 정말 외우기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또 악명 높았던 우리 과의 미생물학 교수님은 온갖 미생물 종의 라틴어 학명을 시험문제로 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시험을 먼저 본 선배들의 팁 중 하나는 학명은 이탤릭체로 쓰는데 손글씨로 쓸 경우엔 이탤릭체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밑줄을 긋는 것으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선배의 팁을 잘 새기고 시험장에 들어가 종명과 속명에 밑줄까지 다 쓰고 나왔는데, 맞으면 1점을 더하고, 틀리면 2점을 깎는 비인도적 채점방식으로 유명했던 미생물 시험의 결과가 매우 이상했다. 나는 분명 정확하게 쓴 학명이 모조리 틀렸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교수님은 속명과 종명에 각각 밑줄을 친 것이 아닌 속명과 종명 모두 주욱 이어서 밑줄을 친 경우 모두 틀렸다고 채점했다. 예를 들어, 대장균의 학명은 Escherichia coli 인데, 이것의 정답은 Escherichia coli 이고 Escherichia coli로 밑줄을 붙여 쓴 경우에는 오답처리를 한 것이다. 이 글을 브런치를 쓰는 와중에도 이 두 사례의 밑줄 차이를 시스템에서 구현하기가 매우 어렵다(억울하다는 얘기다).


(이후 내용에 책 내용의 스포 포함!!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실 분은 읽지 마세요)



이야기가 좀 샜는데, 밀러는 데이비드가 분류학에 몸 바쳐 연구하며 성공과 함께 세상의 풍파를 맞으며, 그의 생각이 기만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목격한다. 그는 분류학을 통해 피라미드와 같이 각 존재들의 우월성을 계층화한기 시작하고, 그것은 결국 우생학으로 이어지며, 우생학은 인간이라는 종안에서도 그 우열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는 생명체의 어떤 특질들은 유전을 통해 대물림된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빈곤'과 '타락'같은 특징들은 유전될 수 있다고 가르쳤고, 우생학을 지지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빈민과 술꾼, 백치들, 도덕적 타락자들을 모아 '적합자'의 반대 범주인 '부적합자'의 범주로 분류했다. 결국 우생학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활용되었고, 미국의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의 이민을 막는 이민법에 활용되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제는 모두 알다시피 게르만족은 유대인보다 뛰어난 민족이라 할 수 없고, 코카시안이 아시안이나 아프리카인보다 IQ가 높지 않다. 범주는 옳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어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과학도인 나도 처음 안,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세상에, 초등학교 때부터 진리로 알고 있었던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의 분류 중에 어류가 없는 것이라니.. 티비 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신기한 생명체들, 물속에서 다리가 달린 채 헤엄을 친다던가, 아가미 대신 폐로 호흡하는 물고기들이 어류를 벗어나는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실 그 개체들은 서로 간 보다 인간과 더 가까울 수도 있는 생명체임에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종이 보는 편협하고 일시적인 시대감각을 가지고 그들을 어류로 퉁쳐 분류해버린 것이다. 자신이 이 지구에서 가장 큰 뇌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기억력이 가장 좋은 것도 아니라는 것도 모른 채.. 마치 외계인이 지구의 존재들을 분류하며 본인들이 관찰했을 때 기다란 기둥 형태를 띠는 인간과 전봇대와 나무를 하나로 묶어버린 것과 같은 짓을 해버리는 것이다.


패러다임이 바뀌듯 완벽히 세상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 그어놓은 선은 변동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잘 알지 못하고 그어놓은 선, 분류는 결국 차별을 낳는다. 인간은 사람을 피부색으로 구분하고, 성별로 구분하고, 나이로 구분하고, 장애여부로 구분하고, 부(富)로 구분한다. 사실 그 모든 것은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펙트럼인 것에 불구함에도! 그리고 그 분류는 자신과 다른 것으로 구분된 존재들을 차별하기 쉬운 잣대가 된다.


MBTI를 입사 지원서에 적는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 뉴스를 보면서 뭔지 모르겠지만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이제는 알겠다. 우리 사회가 또 하나의 편협한 잣대로 사람을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과연 인간이 MBTI라는 기준을 가지고 인간을 구분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분류법일까?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 것처럼, MBTI의 선호 지표라는 기준이 옳지 않다는 근거가 언제 밝혀질지 모른다. 인간이 가장 우월한 존재라는 나르시시즘은 환경을 파괴하고 결국 우리의 생명을 위협한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구분 지을수록 필연적으로 촘촘한 차별은 발생한다. 이제 그만, 분류를 그만두어야 할 때다.


MBTI 그거 다 그냥 장난으로 하는 말에 진지하게 달겨드냐고? 기득권이 장난으로 하는 말에 상처받는 소수자의 마음,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은 알파벳 네 개로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하고 소중한 존재다.


분류할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 것도 저자의 의도라면 저는 소름이 많이 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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