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니 어제 두치와 뿌꾸 봤나? 거기 마빈 박사 진짜 웃긴다 아니가? 막 뭐라캐뿌!”
대구로 이사 오던 날의 첫 기억은 동네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들의 말이 너무 빠르다는 것. 그리고 그 아이들은 싸우는 게 아니라 재미있는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 무슨 말을 한참인가 더했지만 결국 나는 ‘두치와 뿌꾸’ 그리고 ‘마빈 박사’라는 단어만 어렵사리 캐치해낼 수 있었다. ~했다 아니가? ~해뿌 라는 문장을 이해하기에 그들의 문장은 너무 쏜살같았다. 이사 오기 전 어린 시절의 내가 기억하는 대구의 강력한 이미지는 하나가 더 있었다. 뉴스에서 본 폭염 속 대구 모습이었다. TV 속 할아버지들은 나무 밑 평상에 앉아 힘겹게 부채질을 하고 있었고 도로 위에 차들은 아스팔트의 열기를 그대로 받아내며 줄지어 서있었다. TV에서 들리는 쟁쟁한 매미소리를 들으며 으~ 하고 몸을 움츠렸던 기억이 난다.
서울을 떠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한강에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놀 수 없다는 뜻이었고 롯데월드와 목동 아이스링크장에도 갈 수 없다는 의미였다. 학교 앞 간장 떡볶이도 사 먹을 수 없고 하얀색 체육복 대신 3학년부턴 ‘북대구초등학교’라 쓰여 있는 개나리색 체육복을 입어야 했다. 대구는 내게 집이 아니었다. 언젠가 떠날 임시 공간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떠나려고 발버둥 쳐봤자 나는 엄마 아빠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어린이 었고 결국 적응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전학 와서 얼마 동안 나는 동경과 견제의 눈빛을 견디며 진짜 대구 아이가 되기 위한 투쟁에 가까운 적응을 했다. 귤은 새콤한 게 아니라 쌔그러운 과일이었고 숨바꼭질을 할 땐 술래가 아닌 까꾸가 되지 않기 위해 잘 숨어야 했다. 내 짝꿍이 나를 ‘진희야’가 아니라 ‘야, 박진희’라고 부르는 건 남학생의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낭만주의 시인으로 알려진 보들레르는 말했다.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병원 침실에 누워있는 중환자 꼬마였다. 서울에 있는 친척들과 정동진에서 만나 1박 2일 동안 실컷 놀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던 길, 우리 가족만 대구로 내려갈 때의 그 울고 싶은 기분을 아직 잊을 수 없다. 그 후로 몸살을 앓듯 며칠을 끙끙거렸다. ‘후유증’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배웠던 것 같다. 스스로 진단한 나의 병명은 ‘떠나고 싶어 병‘이었다. 몸과 마음이 따로인 상태로 일주일을 지냈다. 몸은 대구에 있는데 마음은 정동진에서 여전히 친척들과 놀고 있었다. 서울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대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대구만 아니면 나는 어디서든 이 지독한 병이 나을 것만 같았다. 인생의 1/2을 대구에서 보내게 될 때까지도 나는 이따금씩 이방인 같은 느낌에 자유롭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자습시간엔 마룬 5의 must get out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this city made us crazy and we must get out라는 구절을 연습장에 몇 번이나 썼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냥 내가 ‘사는 곳’에 지나지 않던 이 곳이 이제 와서 보니 어느새 계속 머물고 싶은 곳이 되어 있었다. 떠나고 싶어 하던 도시가 떠나기 싫은 도시가 된 계기는 없다. 나는 어느새 대구라는 도시를 좋아하고 있었다. 이번 시티투어를 하며 만난 대구는 나의 흔적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청라언덕 계단에 앉아 남자 친구와 군것질을 하던 스물아홉의 내가 있었고 두류공원에선 돗자리 펴고 소풍을 갔다가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옷이 흠뻑 젖어 꺄악 소리 지르며 숨어든 나무가 있었다. 안지랑 골목엔 갓 전역한 남자 동기들이 술에 취해 이모에게 애교 부리던 가게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앞산 케이블카엔 긴장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썸남과 스물일곱의 내가 상기된 얼굴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수성못은 지금까지 내가 드나든 걸음으로 작은 돌멩이들이 모래가 되었을 지경이다. 수성못 산책로에 늘어선 벚꽃나무는 키가 부쩍 커져있었고 오리배는 언제부턴가 밤에 더욱 반짝이는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서울의 한강과 롯데월드보다 대구의 수성못과 이월드에서 보낸 추억이 곱절이 되었다.
어린 시절, 엄마의 허리춤에 매달려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자고 울고 불던 기억을 하니 얼핏 웃음이 난다. 이제 대구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이 무려 내 인생의 2/3이다. 축적의 시간. 나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대구에서 쌓아온 축적의 시간들이 어느새 추억이 되어 나와 그 대상을 애틋하게 이어주고 있었다. 멀리 여행을 갈 때면 아파트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손 흔들어주는 엄마. 친구들과 놀고 밤늦게 돌아올 때면 집 앞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언제 올지 모르는 나를 기다리던 (전) 남자 친구(들). 여행을 갈 때 공항에서 내가 탄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공항직원들. 그들이 말한다. 네가 돌아올 곳은 여기라고.
‘대구광역시’
퇴근길, 고속도로를 타고 대구임을 알리는 푯말을 보며 안도감을 느낀다. 찌든 때 가득한 앞치마를 벗어던지듯 하루의 피로와 고단함을 대구 밖으로 던져버리고 그 대신 대구에 들어서며 나의 진짜 영혼을 갈아입는다. 대구와 아닌 곳의 경계가 이렇게나 차이가 날까 싶으면서도 오른편으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강 건너편 다리를 보며 묘한 안도감에 마음이 든든해진다.
‘임시공간’이 아닌 내 사람들이 있는 ‘안전 기지’
Home, my sweet home은 바로 이 곳. 대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