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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loura May 29. 2021

책임감, 그 무거운 이름

‘매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맡은 바 책임감이 강한 어린이’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예쁨 좀 받는다 하는 아이들의 생활기록부엔 아마 대부분 저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나도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땐 책임감이란 말의 무게를 잘 몰랐다. 그냥 책임감이 강하다는 말은 칭찬이고, 그 반대는 나쁜 것이라는 정도만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은 ‘책임’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의 어깨라던지, 회사를 경영하는 CEO의 뒷모습이 떠올라서 그 단어가 무섭고 무겁게만 들린다. 회사에 갓 들어온 신입들이 일을 다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혼자서 끙끙거리고 있는 걸 보면 안타깝다. 반대로 일하는 직원들이 시간만 때우다 가려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면 필요 이상의 답답함을 느낀다. 책임감의 무게에 따라 내가 힘들거나 남이 힘들거나 했다. 책임감도 결국 균형을 지켜야 하는 일일까.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책임감’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책임감은 좋은 건데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책임감이 너무 과하면 자기만 힘들어. 차라리 책임감 없는 애들은 세상 편하게 살잖아. 적당한 책임감이면 돼.” 이게 내 대답이었다. 언제부턴가 책임감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내게 있어 책임이란 마치 손에 쥔 풍선과 같았다. 주어진 임무를 잘 해내면 그 풍선은 내 손을 떠나 하늘 위로 둥실 떠올랐고, 그 임무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내 손에서 그대로 펑 터져버렸다. 그리고 터져버린 그 풍선 조각은 찝찝하게 계속 내 손에 남아있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쩌면 나는 풍선이 터질까 무서워서 애초에 손에 쥐려고 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 문제를 나는 해결해야만 했다.      


쓸데없는 책임감을 생각하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몇 년 전 패키지로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 프랑스 남부에서 파리로 가는 TGV를 타고 가는데 역무원이 우리 일행에게 와서 가이드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내 시야에 가이드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열차 한 칸을 뒤져가며 열심히 찾아 나섰다. 결국 찾지 못해 울상을 지으니 역무원이 나를 달래며 자신이 찾을 테니 걱정 말고 여행을 즐기라 했다. 찾아달라는 말도 없었으니 어디 있냐는 질문에 모른다고 답하면 될 일이었다. 


두 번째 일은 회사 인턴 때였다. 보통 인턴이라면 업무를 보조하는 수준의 단순 업무를 할 텐데 그땐 인턴의 일손도 아쉬운 때라 정직원과 같은 일을 했었다. 오전 여덟 시 전에 출근해서 밤 열 시까지 업무시간도 같았다. 하지만 역량은 다른지라 기존 직원들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땐 그 업무량의 간극을 채우지 못한 죄책감으로 꿈에서도 서류 작업을 했다. 다른 직원들만큼 일을 해내지 못하니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 미안했다. 하지만 회사에선 오히려 인턴들의 과한 근무시간이 문제 되어 다음 기수부턴 여섯 시 이후 근무가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쓸데없는 책임감이었을까. 그러면 그 무게를 얼마나 덜어내야 적당한 책임감이 되는 걸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책임감은 잘못이 없었다. 그중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선량한 마음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까지 책임지려는 마음이 ‘쓸데없는’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책임감이라는 이름 안에 내가 너무 많은걸 집어넣어 두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선량한 마음: 호의


처음으로 혼자 떠난 중국 여행에서 길을 물어보니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자신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게 도움 준 중국인이 있었다. 숙소를 물어보자 말로 설명은 못하고 내 캐리어를 끌어주며 호텔 앞까지 데려다준 커플도 있었다. 심지어 자기가 데려다줄 테니 자신의 차가 있는 주차장까지 같이 가자고 한 사람도 있었다. 일행이 8명이라 하니 밴이 아니라서 미안하다고 하며 떠났지만 말이다. 낯선 나라에서 만난 이들을 책임감이 강하다고 말하기엔 어딘가 어색하다. 자신이 해야 할 임무가 아닌 호의였기 때문이다. 그 임무를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선량한 마음에서 비롯된 호의라면 그 자체로 충분히 감사할 일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까지 책임지려는 마음


대학 교양수업 중 아동학 교수가 해준 이야기다. 이혼한 부모의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부모님이 왜 이혼했는지 묻자 엉엉 울면서 자신이 라면을 끓여달라고 엄마에게 떼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아이의 부모는 결코 라면 때문에 이혼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부모의 이혼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며 자책하고 있었다. 다섯 살 어린아이에게 그 상황에 대한 통제 가능성은 없었다. 불확실한 선택의 결과와 타인의 감정 또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직급별 역할이나 능력도 마찬가지다.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 대신 내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 된다.     


호의와 임무를 구분하기. 인과관계가 모호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는 죄책감 가지지 않기. 책임감이란 무거운 이름에 다른 것들을 덜어내니 진짜 책임감이 이제야 보인다. 평화. 행복. 감사. 사랑이라는 단어들처럼 책임감도 단점이 없는 단어였다. 앞으로 ‘쓸데없는 책임감’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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